◇…한국 가톨릭 사회과학연구회(회장ㆍ한용희)는 지난5월18일「교회와 국가」를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개최, 그동안 대두돼 온 교회와 국가의 올바른 관계를 조명하기위한 연구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날 발표회에서 이태재(경북대) 조광(고려대) 노길명(고려대) 교수는「교회와 국가」「박해시대의 교회와 국가」「개화기 한국가톨릭교회와 국가」등 3가지 주제를 각각 발표, 초기 및 개화기 한국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밀도있게 고찰, 주목을 받았다. 다음은 이날 발표요지. ◇
◆「이태 재교수」
이날「교회와 국가」를 주제로 첫발표에 나선 이태재 교수는『인간의 초자연적 구원을 추구하는 교회와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는 국가는 각기 독자적 영역과 고유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양자는 현세인을 대상으로 현세안에서 목적을 실현코자하는 단체이므로 불가분적인 중복관계에 놓여있다』고 교회와 국가의 독자성 및 관련성을 설명했다.
이교수는『교회와 국가는 존재의의에 있어 각기 독자성을 지니고 있지만 현세인들은 교회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각자가 속하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생활하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과 국가의 명령이 상충될때 충돌이 생긴다』고 상충될 수 밖에 없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강조했다.
『결국 상충될 수 밖에 없는 관계를 바탕으로 정ㆍ교분리원칙이 대두됐으나 현실적으로는 정ㆍ교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이교수는 특히『교회는 인간의 명령보다 하느님의 명령이 우선한다는 신학적 철학적논리를 천명하고있다』고 밝혔다. 그러나『이 우선의 원칙은 신의 명령에 어긋나는 반논리적 정치에만 국한된다』고 강조한 이교수는 결론적으로『교회는 인간의 존엄서을 말살하는 행위에 대해서 제지할수 있으나 구체적 세부적인 문제는 국가에게 맡길 일』이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조광 교수」
초기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조선왕조의 천주교 박해과정을 중심으로 두번째 연사로 나선 조광 교수는『성리학적 지도이념을 표방하고 있던 조선왕조는 천주교의 전래를 계기로 군주와 국가에 대한 약화와 함께 통치질서의 도전을 받게됐다』고 천주교를 접한 조선왕조의 입장을 밝혔다.
조교수는『충군애국정신이 당시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였고 교회서적에서도 忠의 개념을 강조했으나 교회의 忠에 대한 개념은 임금도 천주의 피조물임을 인식,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강조、『이것이 천주교가 조선왕조로부터 배척 받은 근본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또한『당시의 천주교는 전통적인 孝의 개념도 달리 해석、유교적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양반체제에 도전을 하게됐다』고 주장한 조교수는 정약종의「흉언」이나「황사영백서」등도 당시 신자들의 전반적인 가치관과 통치질서의 부정에서 연투된 것으로 분석했다.
조교수는『결국 조선왕조는 전통적인 질서체제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1세기동안 교회와 국가는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게됐다』고 강조했다.
◆「노길명 교수」
「개화기 한국 가톨릭교회와 국가」를 주제로 마지막발표에 나선 노길명 교수는 조선초기교회가 정교분리입장을 고수、유교주의를 국시로 철저한 정교합일을 표방한 조선왕조와 대립했다고 강조한 조교수의 입장과 같은 견해를 보이면서 그러나『개화기의 교구장들은 철저한 정교분리원칙을 고수、지상의 것은 국가가、천상의 것은 교회가 관장한다는 정치불간섭주의로 일관했다』고 밝혔다.
노교수는 이같은 태도는『한국가톨릭이 국가적ㆍ역사적 분기점에서 민족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제한토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결국 민족과 국가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기능을 약화시켰다』고 강조했다. 이어『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국가와 민족문제에 대처해 나갔다』고 진단한 노교수는『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가톨리시즘에 투철했던 평신도 지도자들과 지식층 신자들의 국채보상운동 의병 독립운동이 바로 구체적인 활동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끝으로『개화기 한국 가톨릭교회는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 교계제도적 교회、하느님 백성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노교수는『정치불간섭주의와 민족과 국가의 요구에 적극 대처한 개화기교회의 이원적인 경향은 가끔 양자가나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고 개화기 가톨릭교회의 성격을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