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를 출발한 마태오 리치는 중국의 긴 강과 운하를 따라 약 18년간의 여행 끝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가 중국의 강에서 본 수많은 작은 선박들은 거대한 베네치아를 연상케 했다. 리치는 자오칭(1583년), 사오조우(韶州·1589년), 난징(南京·1595년), 난창(南昌·1595년)을 거쳐 1598년에 북경에 도착했지만 외국인 감시가 삼엄해 다시 난창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1600년 다시 베이징으로 들어가다가 리칭(Liqing)에서 환관 마탕에 의해 체포돼 톈진(天津)성(城)으로 이송됐지만, 이듬해 1월 황제 만력제의 교지를 통해 유럽의 대사 자격으로 드디어 베이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리치의 중국 선교 첫 동료였던 루지에리는 중국에 교황청 특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1588년 로마로 돌아간다. 당시 강한 쇄국정책을 쓰고 있던 중국에 외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 특사(또는 교황청 대사)의 자격뿐이었다. 리치를 도와주기 위해 사오조우에 왔던 데 알메이다(1591년)와 데 페트리스(1593년)는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리치와 동행하던 바라다스(1595년)는 공강의 급류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중에도 리치는 1594년 불교의 수도승에서 문인 학자로 사회적 위치 변경을 수도회에 정식으로 요청해 발리냐노의 승인을 얻는다. 이후 1596년 난창에서 종신서원을 한다. 리치가 1583년부터 1610년 사망할 때까지 펴낸 많은 역서와 저서들은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펼쳤던 문서선교의 결과였다.
리치는 베이징에서 생활하는 동안 종교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자, 천문학자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국의 과학계에서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연구와 업적은 언제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리치와 서광계의 만남은 이질적인 문화와 사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 이해와 존중을 통해 얼마나 서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빛나는 선례로 남았다. 서광계 일가는 이후 중국에서 그리스도교 확산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610년 리치가 사망하자 황제 만력제는 애도와 함께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무덤으로 쓸 땅을 희사했다.
리치는 400년 전 사망했지만 그의 선교 방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더욱 부각돼 오늘날 문화 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탁월한 선교 모델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