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군종사제가 쓰는 병영일기] “무자식 상팔자?”

입력일 2008-03-16 09:19:00 수정일 2008-03-16 0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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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미사 후 녀석들과 잠깐의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부대별로 삼삼오오 둘러 모여 있거나 혹은 다른 부대에 있는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녀석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입니다.

기껏해야 일, 이십분 정도 만날 수 있기에 이쪽저쪽으로 돌아다니며 말을 붙이느라 바쁩니다. 녀석들은 부대로 복귀해야 하고 저는 또다시 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시간은 얼굴과 이름을 익히는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허나 300명 남짓한 녀석들도 자주 보게 되면 자연스레 얼굴과 이름이 익혀지게 마련인지라 멀리서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면 무척 기뻐합니다.

에사우의 반항

그날은 포항 죽도성당 군종후원회에서 햄버거를 싣고 오신 날이었습니다. 매주 커피와 초코파이 두세 개 정도로 아쉬움을 달랬는데 햄버거를 만난 녀석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도 덩달아 신나서 “햄버거 맛 어떠냐?”라고 말을 건네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말 붙이는 저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홱 돌리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녀석의 어깨에 몸을 실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왜 무슨 일 있냐?” 그랬더니 얼굴을 돌린 채로 “신부님은 해군 수병들만 좋아하지 우리 해병들은 싫어하시잖아요.”라고 말하는 겁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되물었더니 신문에 난 신부님 글을 읽었다는 겁니다. 신부님이 수병들은 똑똑하다고 칭찬하고 자기들 해병들은 단순 무식하다고 표현했기 때문에 속상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랬냐. 성서에 나오는 에사우가 신중함이나 치밀함이 부족했다는 표현이었다. 너희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계산적이지 않고 순박하고 씩씩한 너희들의 모습을 에사우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등등의 말로 녀석을 달래보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입을 한발 빼물고 말하는 겁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신부님이 여기 오시기 전에 해군 수병들과 오래 계셨기 때문에 수병들을 더 이뻐하시는 거 맞잖아요.”

알고 보니 앙탈쟁이

가만 보니 어깃장 놓는 것 같았습니다.

이리저리 해명하려하는 당황한 저의 모습을 보며 내심 즐기고 있는 녀석의 속내가 느껴지는 겁니다. ‘아차차 당했구나!’

녀석 궁둥이를 뻥뻥 걷어차 주며 “임마! 어디서 앙탈이냐.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댄다. 신부님한테는 해병이나 수병이나 똑같은 내 새끼들이다.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유치원 애들 마냥 삐치기는. 에라이~.” 그랬더니 헤벌레 웃으며 “신부님~ 당황하시니까 얼굴 빨개지시는데요. ㅋㅋ 다음 주에 뵐게요.”라고 애교(?)를 떨며 자리를 뜨는 겁니다. 이런이런….^^

신부도 부모 맘 안다구요

신부님은 자식을 키워보지 않아서 부모 된 마음을 모른다고, 부모 노릇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말 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났습니다.

사실 부모 된 마음도 잘 몰랐고 부모 노릇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잘 몰랐습니다. 허나 지금은 아닙니다.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누가 뭐래도 이놈들은 내 새끼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부지가 잘 키우라고 맡겨주신 내 새끼들입니다.

미사 시간에 소란스럽게 떠들고 엎어져 잔다고 잔소리를 하는데도, 그 잘난 초코파이 주었다 뺏었다 장난치며 거들먹거리는데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제 주위를 맴도는 사랑스런 내 새끼들입니다.

교리상식이나 전례에 대한 질문에 거창한 단어는 아닐지라도 떠듬떠듬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알고, 군에 오기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초코파이 하나에 감사할 줄 아는 이쁜 녀석들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꼬집는 강론을 듣고 나면 꼭 한둘은 미사 후에 고해성사를 청하며 눈물 흘리는 순진한 하느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나저나 긴장해야겠습니다. 계집애 같은 수병들이라고 놀렸다는 것에 앙심(?)을 품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올 놈들이 있을 텐데 또 얼굴 빨개지며 당황하면 안 되잖아요. ^^

김준래 신부(군종교구 충무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