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타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너무도 구태의연해서 이제는 쓰지도 않는 말이다. 너무 익숙해서 식상할 뿐만 아니라 10년이라는 시간은 이제 현대인들이 변화의 폭과 깊이를 헤아리는 단위가 애당초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종종 10년, 20년 전에는 “이러했다”고 회상하는 것은 잊거나 잃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우려에서이다.
일이십년을 돌이켜보면 오늘날 변화된 것이야 헤아리기도 힘들다. 그중에서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변화 한 가지를 골라보자.
옛날에는 대중 목욕탕에 가면 익숙한 풍경 중의 하나가 남의 등을 밀어주는 일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알몸으로 만난 것도 모자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특산품 ‘이태리 타월’(때수건)을 내밀면서 “등 좀 밀어주실래요?” 했던 풍경은, 그야말로 한 인기 TV 프로그램 제목처럼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올드 앤 뉴’이다.
물론 등을 맡긴 뒤에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방의 등을 밀어주는 것이 예의였다. 이렇게 주고 받는 것이 상례이기에 의례 등판이 넓고 우람한 상대는 고르지 않는 것이 요령이었다.
등 밀어주기나 가방 받아주기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 소통의 한 가지 형태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남에게서 인정받고 애틋하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 동시에 포함된 본능적인 의사 표시이다.
지하철이 보편화되기 전에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었던 버스 안 풍경도 비슷했다. 요동치는 버스 안에서 조그만 핸드백이라도 들고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빼앗듯이 받아서 무릎 위에 얹어두는 것이 앉아 가는 승객의 매너였다.
지금은 전철 안에서야 선반 위에 두더라도, 버스 안에서도 가방 받아주는 일이 별로 없다. 요즘 버스 안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가장 익숙한 풍경은 이어폰을 끼거나 첨단 DMB폰, PSP, PMP 등으로 자기만의 세상, 타인들과는 단절된 자기 세계 안에 묻혀 사는 일상이다.
현대 사회는 정보사회로 불리운다. 정보사회의 기반은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시공을 뛰어넘어 가장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현대의 첨단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물리적으로 가장 근접한 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는 최악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0과 1의 연산으로 이뤄지는 디저털의 차가움과 선명함에 물린 사람들이 오히려 아날로그에 향수를 갖는 것은 어쩌면 디지털이 야기하는 인간 관계의 상실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스도교는 애당초 ‘관계’였다.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도록 해주는 ‘커뮤니케이션’은 원래가 교회의 것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자기 커뮤니케이션,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써 피조물과 소통하시기를 원하신 하느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모세와 커뮤니케이션하셨다. 마침내 당신 아드님을 통해 절정을 이룬 하느님의 자기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교회의 소명으로 주어졌기에 우리는 온세상을 향해 복음을 커뮤니케이션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달인
예수님은 가장 완벽한 커뮤니케이터이셨다. 시간과 장소, 말과 행동, 근본적으로는 당신 인격의 전부를 통해서 총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심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으로 평가된다. 교회는 예수의 모범을 따라 토털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해야 한다. 우선은 교회 안에 갇혀있는 폐쇄회로여서는 안되며, 세상으로 열려 있는 채널을 통해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하되, 총체적이고 전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격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박영호 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