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 사람다움에 대한 목마름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입력일 1999-09-12 12:47:00 수정일 1999-09-12 12:47:00 발행일 1999-09-12 제 216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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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헤매면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행인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무엇을 그렇게 찾느냐』고 물었다. 디오게네스는 『인간을 찾고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 온통 인간들인데 인간을 찾고 다니는 디오게네스가 미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았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디오게네스가 찾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정치나 제도나 윤리나 도덕이나 제도화된 틀에 의해 증발되고 없는 휴머니즘을 찾는 것이고, 인간 내면에 살아있는 실체적 진실을 찾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대낮에 인간을 찾는 디오게네스의 방황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철학자 니체는 신의 죽음을 말할 때 그 첫머리에 페르시아의 한 배화교 신도로 하여금 백주에 등불을 들고 시장터를 찾아 헤매게 했다. 그는 사람들을 붙들고 신을 죽인 살인범을 찾아 헤맨 것이다.

휴머니즘 찾는 디오게네스

20세기 철학자 샤르트르가 한 주인공으로 하여금 상실한 자아를 찾아 헤매게 했을 때도 백주에 등불을 들려 남들 속에서 내가 누구냐고 묻고 다닌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에릭 프롬은 인간은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미 20세기 세기말 혼돈을 예언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성 상실에 의한 인간부재의 참상이다. 우리는 그 무덥고 잔인한 계절 여름을 넘기면서 인간다운 인간을 그리워했고, 진실에 목말라했다.

옷로비 사건에 이어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 청문회를 열었다. 세간에 화재를 뿌리고 이목을 집중시킨 상류층의 부인들과 고위층 인사들이 나와 저마다 진실을 말하겠다고 선서했다. 점심을 굶는 결식학생들이 늘어가고 아직도 수마에 시달리는 수재민들이 참담함을 못이겨 울분을 토하고 있는데 호랑이 무늬 밍크코트를 주었느니, 안받았느니하며 다투는 것 자체가 사치스런 일이며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때 자선활동이라는 좋은 취지로 만났다는 권력가와 재벌가 사모님들의 만남과 활동이 얼마나 알맹이 없고 허영에 찬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청문회였다. 그래서 진실을 캔다는 청문회는 진실을 희롱하고, 국민들을 희롱함으로써 일반 국민과는 별 관계가 없는 그들만의 추태로 끝을 맺은 것이다.

요즈음 말끝마다 서슬이 퍼런 「개혁」이란 말도 그렇지 않은가? 역대 어느 정권도 개혁을 외치지 않은 정권은 없었다. 그러나 개혁이 「구조만 바꾸면 모든게 다 잘 된다」는 식의 만병통치의 처방은 아니다. 이제 국민들은 「조국 근대화」다 「민주화」다, 「보수」다, 「진보」다 하는 구호에 식상해 있다. 사람의 정신이 바뀌지 않은 개혁, 구조만 바꾸어 짜맞춰 놓은 개혁이란 자칫 하나의 독단에 빠질 수 있음을 우린 과거의 시행착오에서 여실히 보아왔다.

개혁은 사람의 정신을 바꾸고, 사람다움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것이 돼야한다. 그래야 우리가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알렉산더 대왕이 크린트 시를 방문했을 때 소문난 디오게네스를 찾은 일이 있다. 술통개를 집으로 삼고 그 속에서 볕을 쬐고 있던 이 철학자에게 『소망이 있거들랑 무엇이든 나에게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서 있는 자리에서 비켜 서 주시오. 볕이 가려서 춥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새삼 떠오르는 요즘이다. 세상이 메마르고 사나울 때면 디오게네스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한두명 뿐이겠는가!

지금 거리에 나가보자. 인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디오게네스처럼 「인간을 찾고 있는」철학자가 있거든 물어보자. 『인간은 어디에 있는지. 진실이란 우리 사회에 무엇인지…』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