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 사랑하면 알리라

입력일 2023-05-10 수정일 2023-05-10 발행일 2023-05-14 제 334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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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 8,5-8.14-17 / 제2독서 1베드 3,15-18 / 복음 요한 14,15-21
수난의 길 앞둔 고별의 순간에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신 예수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실천할 때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 볼 수 있어

폼페오 바토니 ‘성부 하느님과 성령’.

원님 덕에 나발 불기

제 경험을 돌아보면, 사제의 삶은 ‘원님 덕에 나발 부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로서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을 내밀 때, 그 손이 빈손이 되지 않도록 채워주시는 분들이 늘 있었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성당을 지으셨다, 또는 어떤 기관을 설립하고 키우는 업적을 세우셨다, 그렇게들 말합니다만, 사실 공사비를 대거나 땀 흘려 일한 분들은 따로 있지요. 사제가 깃대를 흔들면, 실제 일은 다른 누군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해주시는 게 보통입니다.

성사를 집전하고 면담을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그 어떤 성사도 스스로 창작하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교회가 전해 온 바를 수행할 따름입니다. 젊은 사제가 여러 면에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고민들을 듣거나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선배 신부님들이 쌓아놓은 신뢰 덕분이었지요. 그게 아니라면, 아직 젊은 신부님 앞에 연륜이 꽉 찬 어르신들이 고개 숙여 고해성사를 보거나 고민을 나누는 일은 없을 터입니다.

겸손하고 성실하게

비단 사제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은 언제나 ‘원님 덕에 나발 부는’ 면을 품고 있습니다. 세상 누구도 자급자족의 완성형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재주를 가진 사람부터 최고 난이도의 전문직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홀로 능력과 업적을 쌓지 않았습니다. 환자 없이 명의 없고, 수많은 판례가 쌓인 끝에 훌륭한 법률가가 나옵니다. 학계에 누적된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가 없었다면 어떤 천재 학자도 나올 수 없겠지요.

이렇게 세상 무엇도 자기 힘으로 다 이룬 것이 아니라는 점을 통찰할 수 있다면, 그는 어느 때라도 흔들림 없이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된 말로 ‘삼팔선 혼자 지킨다’는 과도한 자의식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모범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앞으로 오실 성령께 제자들을 맡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만납니다.

존재의 근원과 의미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고별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그래서 뜬금없는 소리도 한 번씩 하는 이 어리숙한 제자들을 두고 수난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수난 다음에는 더 이상 지금껏 해왔던 방식으로 그들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스승이라면 조바심이 나서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하실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19-20) 이렇게 예수께서는 당신과 우리 존재의 근원과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사랑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당신의 모든 활동이 성부의 사랑에로부터 흘러나왔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넘기고 저승에 보내실 정도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자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듯,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성부와 성자와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인간이 그 어느 때라도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지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

이 확고한 약속 덕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시콜콜 많은 것을 가르치는 대신, 가장 중요한 계명을 확인해 주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 계명이 무엇인지 신앙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신”(제2독서; 1베드 3,15) 이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바로 그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으로 이룰 수 있는 일

신앙인들이 기도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1베드 3,16)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나 혼자 해야 하는, 나만의 임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 일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킵니다. 제1독서가 전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제1독서; 사도 8,7-8) 우리가 정말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우시다면, 먼저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 보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지켜보십시오. 우리가 사랑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