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5)다시 인간을 묻는다 - 몇 개의 상념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3-03-14 수정일 2023-03-14 발행일 2023-03-19 제 3335호 1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인공지능과 저출생의 도전 앞에서 ‘인간’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기계 능력이 인간 능가한다 해서
생각의 영역까지 넘어설 순 없어
오히려 AI 둘러싼 자본·권력의 힘
우리 삶 미치는 영향 더 성찰해야

■ 챗지피티, 인간 증강

챗지피티(ChatGPT)에 관한 이야기가 범람하고 있다. 하나의 첨단 과학기술이 등장하면, 그 기술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논란이 분분하다. 현대는 자본주의 시대여서 어떤 현상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늘 경제적 관점에서 시작된다. 챗지피티로 대변되는 인공지능 사업이 산업계와 국가 경제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인공지능 언어모델에 대한 개발이 사람들의 일자리 생태계에 어떤 심각한 여파를 줄 것인지. 자동화 기계와 인공지능형 로봇이 등장했을 때는 블루칼라 직업군들이 위험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챗지피티 현상 속에서는 화이트칼라 직업군들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다.

두 번째 반응은 교육계에서 발생하고 있다. 논문과 글쓰기가 주요 교육 방식의 하나인 학교의 영역에서 챗지피티는 심각한 도전을 야기하고 있다.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을 통한 대필과 교묘한 표절이 가능해졌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번역이 더 이상 사람의 노력과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창의성에 대한 이해가 바뀌고 있다. 창의성은 자료들의 종합과 변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에 달려있다고 한다. 질문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김만권, 한겨레신문 칼럼) 인간은 몸을 통한 체험 속에서 고유한 지식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기계의 지식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임소연, 씨네21 칼럼) 흐릿한 복사본을 바탕으로 하는 인공지능은 우주를 닮은 인간의 독창성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한다.(테드 창)

정말 인간의 고유한 창의성을 기계가 모방하고 복제할 수 없는 것일까. 솔직히 고백하면, 한 개인적 인간의 창의성이 과연 엄청난 데이터의 종합과 변주를 통한 기술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과 회의가 들기도 한다.

종교계 역시 챗지피티의 도전에서 비껴갈 수 없다. 챗지피티는 강론과 설교의 영역에서 모방과 표절의 위험을 초래한다. 또 한편으로 상투적인 상담, 현장성과 독창성을 상실한 자기계발 담론들은 점점 더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인들에게 묻고 상담하기보다는 대화형 인공지능에 더 의존할지도 모른다.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그저 외형적으로 그럴듯한 신앙 담론을 통해 종교적 힘을 행사했던 종교인들의 영향력은 감소할 것이다. 어쩌면 이제 종교인들이 말보다 삶으로 증거해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과 충격은 현기증 나게 한다. 얼마 전 뉴스에서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뇌신경과학 스타트업 뉴럴링크가 인간의 뇌에 칩 이식 실험을 시작하려 했지만 미국 정부가 승인하지 않았다는 기사와 다음 세대쯤에는 휴대전화가 우리 피부에 이식될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현실화를 목격하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을 통한 ‘인간 증강’(Human Augmentation) 현상은 인간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질문을 낳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단순히 과학자의 영역에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은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기능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정치·경제적 역학의 문제도 포함한다.(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 이에 반해,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적·신학적 담론들은 그저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윤리적 선언이 자본과 권력과 정치의 이해관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 저출생 쇼크

우리나라 지난해 합계 출산율이 0.78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가 이미 오래전에 ‘저출산·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통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주변만 돌아봐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저출생의 원인은, 노년 세대가 함부로 진단하듯이, 오늘의 젊은 세대가 단순히 자기만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세대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창 시절부터 소수만 살아남는 생존 경쟁에 시달리며 살아온 세대다. 오늘의 교육 현장을 보면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것 같다. 초중고 시절에는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오로지 진학을 향한 경쟁적 삶을 산다. 대학 시절에는 취업을 향한 생존 경쟁에 매달리며 산다. 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끊임없는 도태의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 소수의 승자만이 경쟁 과정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발생하는 속물적이고 쾌락적인 유희와 풍요를 탐닉하는 현실이다. 취업, 주거, 육아 문제가 해결되고 청년들의 일상 삶이 안정되고 그들의 미래가 희망적이 될 때만이 출산율은 높아질 것이다. 저출생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스스로 만든 ‘인과응보’적인”(문화평론가 정지우 페이스북에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 죽음, 육체, 자의식, 영혼

친한 동료 신부 어머니 장례식에 참여했다. 수의에 꽁꽁 싸여 자그마한 형태로 매장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을 생각했다. 몸은 땅에서 썩어 흩어질 것이지만 그의 영혼은 주님 안에서 머물기를 기원했다. 영혼은 ‘나’라는 주관적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 몸은 사라져도 ‘나’는 여전히 ‘나’일까.

우주는 물질의 세계다. 이승의 삶을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이 몸(물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식은 몸과 뇌에서 기인한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몸과 뇌가 사라지는 죽음은 의식도 사라지게 하는가. 의식은 사라지지만 ‘나’라는 자의식은 인간에게 영원한 것일까.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주장처럼, 인간의 의식은 몸과 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감각과 의지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은 “정신적 생물”이고 누구이기를 스스로 의지(意志)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물질 환원주의와 자연주의의 방식으로만 인간을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일까.(「나는 뇌가 아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의지’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 알량하고 어설픈 화해

의식, 인지, 생각, 인식, 지능, 상상, 지각, 감각 등은 몸과 뇌와 결부된, 인간의 구성적이고 기능적인 요소들이다. 지능은 인간 영역의 일부다. 기계의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한다고 해서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인공지능을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역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더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신학자다. 인간 삶의 다른 전문 영역들, 특히 과학의 영역에 대해서는 인식 수준이 정말 초보다. 겸손하게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을 맞이하면서, 저출생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보면서, 죽음이라는 실존적 소멸의 압도적 현실 앞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