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 시대의 성인들] (1) 들어가며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2-12-27 수정일 2022-12-28 발행일 2023-01-01 제 332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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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법 배우다
고대·중세에는 
세속과 멀어진 성인들을 추대
근·현대에는
사랑 실천한 이들을 존경

‘성인=옛 사람’은 오해일 뿐
우리와 같은 시대 인물도 많아
‘영성의 모델’ 찾는 기회되길

지난해 5월 1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시성식 모습.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시성식을 주례하고 복자 10위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CNS 자료사진

고대, 중세 등 먼 과거에도 성인들이 있지만, 지금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던 이들 중에도 성인은 있다. 가톨릭신문은 우리 시대 성인들의 삶과 행적, 그 안에 담긴 영성을 찾고자 2023년 ‘우리 시대의 성인들’을 연재한다. 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성인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성인을 배우는 의미를 살펴본다.

성인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신자들은 예로부터 성덕이 뛰어난 이들을 존경해왔다. 교회는 이렇게 성덕이 높은 이들이나 순교자들의 탁월한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 이들에게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시성, 바로 성인이라 부르며 현양한다. 성인의 삶과 행적을 알고 따르는 것만으로도 우리 영성생활에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성인’이라 하면 어쩐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성덕이 높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성인들의 이야기라 하면 전설이나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의 인물이나 초기 그리스도교를 훌륭하게 이끈 주교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큰 성덕을 쌓은 수도자나 영성가, 조금 더 가깝게는 조선시대를 살았던 103위 순교성인들이 생각기도 한다. 2000년이 넘는 교회 역사 안에 고대, 중세시대를 살아간 훌륭한 성인들이 많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앙생활을 해온 것은 어떤 면에서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성인이 살아간 시대는 꼭 그렇게 먼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난해에도 5월에 복자 10위가, 10월에 복자 2위가 시성됐다. 그중에서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를 살았던 이들은 8위에 달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역시 대부분이 1950년대에 순교한 이들이고 하느님의 종 김선영(요셉) 신부는 1974년에 순교했다.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았던 이들이다.

전설처럼 여겨지는 성인들의 기적도 그리 옛 일이 아니다.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가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한 성모님을 만난 것도 20세기 초반이었고,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가 환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 하느님 자비 신심을 전한 것도 1930년대다. 몸에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지닌 비오 신부가 선종한 것도 1968년의 일이다.

마더 데레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생전부터 여러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들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성덕을 보여주다

“우리는 흔히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느 곳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부름 받고 있습니다.”(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4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5월 15일 시성 미사 강론 중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인용하면서 “성덕은 몇몇 영웅주의 행동이 아니라 수많은 일상의 사랑으로 이뤄져 있다”고 강조했다. 소위 ‘세속’이라 불리는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는 것만이 성덕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세상 한 가운데서 성덕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대, 중세 성인들과 근·현대 성인들의 차이가 있다. 중세까지 신자들의 관심은 세속에서 멀리 떨어짐으로써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속과 떨어져 성덕을 쌓았던 성인들이 많이 부각됐다. 반면 우리 시대를 살아간 성인들은 대부분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갔다. 중세 이전의 성인과 근·현대의 성인 모두 우리에게 큰 모범이 되지만, 우리 시대를 살아간 성인들에게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전영준 신부(바오로·가톨릭대학교 신학부총장 및 신학대학원장)는 “근대에 들어 과거와 같은 관상생활 중심의 전통적인 수도원의 모습과 다르게 사회적인 요청에 응답하는 활동 수도회의 모습이 늘어났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다양한 영적 여정을 배우며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혼란한 시대에 사랑으로 승리한 성인들

20세기를 살아온 현대인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대공황 등을 겪었다. 이어지는 거대한 전쟁과 가난으로 하느님의 존재는 물론이고, 인간의 가치까지도 부정하는 세상 속에서 세계 전체가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왔다. 성인들은 우리와 똑같이 혼란하고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승리한 모범이란 점에서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된다.

성인들은 군인들의 총부리 앞에서도 사랑을 꽃피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데레사 베네딕타(에디트슈타인) 수녀와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하기까지 이 시대에 필요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복음을 세상에 전할 사도직단체를 만들었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군인의 총탄에 죽기까지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 편에서 군부를 향해 정의를 부르짖었다.

샤를 드 푸코는 영적인 가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사랑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모범을 제시했고,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는 가난한 이들 안으로 깊이 들어가 말 그대로 가난한 이들의 ‘엄마’가 돼줬다.

아울러 요한 23세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등 교황들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고 실현해 나감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인도했다.

윤주현 신부(베네딕토·가르멜수도회)는 “무신론, 세계대전, 대공황 등의 세계 상황 안에서 현대인들은, 특히 가난한 이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왔다”면서 “그런 세상이 요청하는 시대의 징표에 응답해 일상 안에서 성성(聖性)을 발견하는 분들,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분들, 우리 시대 성인의 모습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닮아야 할 영성의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