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25)양자물리학과 신앙

김도현 바오로 신부(전 서강대학교 교수)
입력일 2022-12-20 수정일 2022-12-21 발행일 2022-12-25 제 332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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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의 시대… 신앙 행위가 가장 합리적이다
신앙인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미래가 바뀔 수 있다고 믿어
비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볼 때
신앙은 이성적이고 적절한 행위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참석해 양자물리학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1927년 제5차 솔베이 회의 기념사진. 양자물리학과 우리의 신앙 행위는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지난 일 년에 걸쳐 저는 이 지면을 통해 과학과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무신론적 과학만능주의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흔히 내세우는 빅뱅 우주론과 진화론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빅뱅 우주론의 경우는 우리의 신앙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영감을 우리에게 제시함을 알 수 있었고, 진화론의 경우는 예상외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기대에 비해 탄탄하지 못한 이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올해의 마지막 글로서 저는 양자물리학의 세계관에 비추어 우리의 신앙 행위가 대단히 합리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 드릴까 합니다.

제가 사제품을 받은 후 고해를 들으면서 크게 놀랐던 점 중의 하나는 ‘우리 신자분들 중에 점집에 다니는 분이 예상외로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철학관이나 타로점집뿐만 아니라 무당이 운영하는 점집도 다시시더군요. 특히 혼기가 찬 자식을 둔 부모님들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난달의 글을 통해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시간의 화살’로부터 파생되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점을 보는 행위를 통해 미래를 예측해주는 점쟁이에게 기대는 것이 어떤 면으로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점을 봐서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 하는 질문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점을 봐도 잘 안 맞으면 굳이 점을 볼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주팔자-음양오행 분석법은 한 사람의 미래 운명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동양에서 점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사주(四柱)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태어난 년, 월, 일, 시 이 네 가지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간지(干支)로 풀어쓰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이 둘을 합해서 흔히 사주팔자(四柱八字)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주를 보는 행위 안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운명은 그 사람이 태어난 년, 월, 일, 시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개념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음양오행(陰陽五行)인데, 이것은 음(陰·달), 양(陽·해), 그리고 오행성(五行星)인 화성(火星), 수성(水星), 목성(木星), 금성(金星), 토성(土星)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특정 행성의 기운을 더 많이 갖고 태어나게 되고, 그 기운에 의해서 그 사람의 성격과 건강 등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은 금의 기운이 강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화의 기운이 강하다고 보는 것이죠. 음양오행을 따지는 행위 안에도 역시 기본적으로 ‘인간의 운명은 그 사람이 태어난 시점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주팔자-음양오행 분석법은 물리학의 용어를 빌리면 ‘한 사람이 태어난 시점인 초기 조건’과 ‘사주팔자-음양오행의 기본 법칙’을 통해 한 사람의 미래의 운명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운명에는 그 사람의 태어난 시점 외의 다른 요소들, 예를 들어 부모의 환경 등도 사주팔자-음양오행 분석법에서 고려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은 사실 17세기 이래로 고전물리학이 강조하던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질량을 가진 두 물체 간에 서로 잡아당기는 힘을 설명하는 중력 법칙(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도 불리죠)을 발견한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1643~1727)은 그의 위대한 저서 「프린키피아」와 「광학」을 통해 ‘한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한 특정 시점인 초기 조건’과 ‘역학의 기본 법칙’을 통해 한 물체의 미래 운동 상태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뉴턴의 세계관은 사주팔자-음양오행 분석법과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뉴턴의 이 결정론적 세계관은 등장 이후 수백 년간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반으로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양자물리학을 이론적 배경으로 탄생한 반도체.

하지만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은 20세기에 등장한 양자물리학의 세계관인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자연의 본성상 한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의 핵심 원리인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양자물리학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내용인 ‘입자-파동 이중성’과 ‘중첩 원리’ 등으로 인해 우리가 아무리 역학 법칙을 정확히 알더라도 한 물체의 미래 운동 상태를 정확히 알아낼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결국 한 물체의 미래 운동 상태에 대해 확률론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 시점인 초기 조건’과 ‘사주, 음양오행의 기본 법칙’을 통해 한 사람의 미래 운명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 역시도 혹시 잘 들어맞지 않는 세계관이 아닐까?

만일 결정론적 세계관이 정말 잘 맞는다면 우리는 왜 굳이 시간을 들여서 기도하는 것일까요? 기도를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미래의 운명은 정해져 있을 텐데요. 만일 결정론적 세계관이 정말 잘 맞는다면 우리는 신앙을 가지든 안 가지든 상관없이 우리의 길흉화복은 결정되어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미래의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미래의 삶이 바뀔 가능성이 없고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굳이 성당을 다닐 필요도 없고 묵주기도를 바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TV 드라마를 보는 것이 더 즐겁겠죠.

우리의 신앙 행위는 바로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 자신의 청원을 들으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등장한 양자물리학이 바로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전자나 원자 등의 물질의 미래 예측도 원리적으로 불가능한데 하물며 인간의 미래 예측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 깊이 파고든 결정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점을 치는 행위를 포함한) 여러 미래 예측 프로그램들로부터 벗어나 우리에게 ‘시간의 화살’을 허락하시고 미래를 유일하게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그분께 우리의 미래를 내맡겨 드리는 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적절한 행위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신앙 행위는 결코 미신이 아닙니다. 현대 양자물리학의 시대에서 가장 합리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김도현 바오로 신부(전 서강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