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6)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10-19 수정일 2022-10-19 발행일 2022-10-23 제 331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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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붙들고 울고 웃었던 시간이 사제생활의 전부”
오래도록 큰 부담으로 다가온 강론
‘내 말’ 아닌 ‘하느님 말’ 전해야 한다는
깨달음 얻은 후 말씀 안에서 자유 느껴

이병호 주교는 하느님 말씀을 가지고 그 안에서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살아온 하루하루가 사제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사제품을 받고 전주교구 중앙주교좌본당 보좌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갈등 속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 몇 년 전, 부제품을 앞두었을 때였습니다. 사제가 되겠다고 긴 세월을 보냈는데, 막상 사제직이 눈앞에 닥치니 정신이 번쩍 들고 겁이 왈칵 났지요.

“사제가 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이 되시는 신자들 앞에서, 인생이 어쩌구 사는 것이 저쩌구 하며 말을 해야 할 게 뻔한데, 삶의 체험이라고는 거의 없이 어떻게 내가 그분들 앞에서 입을 열 수 있단 말인가. 노동을 하든 뭘 하든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 살아보고 난 다음, 그래도 사제가 될 생각이 남아 있으면 돌아오고, 아니면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옳겠다.”

그래서 교구장님을 만나서 결단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주교님이 계시는 전주에까지 가려면 기차로 거의 10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워낙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망설일 겨를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놀랍게도 당시 전주교구장이셨던 한공렬 주교님께서 무슨 일로인지 서울 혜화동 신학교로 오셨습니다. 면담을 요청해서 딴에는 비장한 각오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말조차 없었지만, 요즘이라면 이른바 ‘모라또리움’을 신청한 셈이지요. 그런데 그분은 다 듣고 나서 껄껄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신부가 되고 나서.”

그래서 신부가 되기는 했는데, 특히 주일이 되면 그 큰 성당에 교우들이 꽉 들어차고, 맨 앞줄에는 예상했던 대로 할아버님 할머님들이 줄줄이 앉아 계셨지요. 잔뜩 긴장해서 준비한 원고를 읽는 식으로 강론을 하고 나서 미사를 마치고 제의방으로 돌아오면, 온몸의 기운이 구멍 난 축구공처럼 완전히 빠져나가고, 저는 제의상에 쓰러지듯 엎어져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심경으로는 차라리 소련(당시에는 펄펄 살아있었으니까)으로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말 그대로, ‘철의 장막’을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고, 그걸 넘다가 전기줄에 감전해 죽든지 총에 맞아 죽겠지만, 적어도 사제로 죽을 수는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제 삶에서 강론이라는 것이 참으로 큰 부담이었습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복음 선포를 위해서이고, 그 쪽을 향해서 십 수 년을 준비한다고 한 사람이, 바로 그 일에 그런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은, 정신 차려 생각하면 도통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 되든 말든 당시 제 심경이 그랬던 것은 사실입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강론에 대한 부담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고, 특히 본당의 연세가 높으신 회장님들께서 어떤 때 강론이 감동적이었다며 용기를 북돋아주시기도 하셨지만, 강론은 오랫동안 저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번개처럼 한 줄기 빛과 함께 이런 말씀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야 임마, 내가 너를 보낼 때는 ‘내’ 말을 하라고 보냈지, ‘네’ 말을 하라고 보냈냐?!”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어깻죽지에 날개가 솟아나는 듯했습니다. “그렇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화살처럼 쏘아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을!” 그러고 되돌아 생각해 보니, 하느님 말씀 앞에서 양심이 찔리고 부담이 가고 때때로 정신이 아뜩해 지는 것은 당연하고 다행스럽고 건강한 일이었습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그 대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아 끼우기 위한 심장수술에 따르는 아픔이기 때문이지요. 아픔뿐 아니라, 정신이 혼란스럽고 세상만사가 뒤죽박죽으로 보일 때, 하느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다시 분명해지고, 질서를 회복하고, 축 처졌던 다리에 힘이 생기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먼저 체험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말이 상대방에 가서 똑같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졌습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느끼던 건강치 못한 두려움 대신, 모든 지혜의 시작인 두려움이 들어선 것이지요. 저를 잘 아는 동창 신부님 한 분은 어느 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뀐 것이 아니라 뒤집어졌다.”

그리고 어떤 교우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강론대에 서시면 다른 사람이 되시는 것 같아요.”

정말 그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스스로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제생활하면서 이룬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기억나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 말씀을 가지고 그 안에서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고민하기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가 완전히 새로 시작되는 느낌이지요. 아침 일찍 성당에 들어가 성경을 펴들면, 똑같은 말씀이, 마치 처음 대하는 듯, 전혀 새롭게 보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낡은 것, 의례 그런 것, 판에 박힌 것이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이사 43,19 공동번역)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