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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7)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8-17 수정일 2022-08-17 발행일 2022-08-21 제 330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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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교회가 할 일에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부르심 받고
사회사목 현장에서 기쁘게 소임 다해
민족화해·사회교리 등 다양한 학교 열어
평양교구 사목방문했던 기억도 생생해

1996년 4월 7일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서 집 없는 이들과 함께 봉헌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광주대교구 제공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며 웃었던 적도 있습니다. “나, 하느님께 너무 당하는 거 아닌가?”신학생 때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시작으로 레지오마리애, 가톨릭성서모임을 비롯해 각종 사도직 단체 활동과 강의 등을 다채롭게 지원해왔습니다. 정식 발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신학교 교수로 살면서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했지만 힘차게 동참했던 활동들이었거든요. 이상하리만치 하느님께서는 저를 갖가지 활동으로 이끌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신나게 살고 있는데 갑자기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교황님께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지명하셨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당황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신학교에서 살다가 무덤까지 갈 줄 알았습니다. 1976년 호적제도가 바뀔 때 고향집에서 분가하면서 저는 본적도 혜화동 90-2(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로 옮겼고요.

제가 주교직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제인지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일주일의 말미를 얻었죠. 묵상을 하면서 다시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주교직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다만 주교는 세계교회의 신부가 되는 것이죠. 또 한 지역 교회의 중심이 됩니다. 정식으로 본당사목구를 맡아 본당신부를 한 적도 없었는데, 감히 세계교회의 사목을 책임지는 주교가 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죠. 하지만 저는 교구장 주교도 아니고 그 교구에 적을 두고 교구장 승계권을 이어받는 부주교도 아니고, 교구장에 협력하는 보좌주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되었습니다. 보좌주교에겐 명의교구, 즉 주교좌가 현존하지 않고 이름만 남은 교구가 주어지기에 다른 교구에 가서 협력을 하게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건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님을 보필하면서 사목에 협력하고 그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기에 감히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서울본당’ 보좌라고나 할까요.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저는 그저 이 한마디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1995년 5월 15일 평양교구 사목방문 중 평양 장충성당 교우들이 최창무 주교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광주대교구 제공

주교가 되고 한 달여 만에 담당 업무를 받았는데 ‘사회사목 주교대리’였습니다. 이러한 직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적용하는 노력의 하나로, 한국교회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실천하고 세상 속에서 발로 뛰는 모습을 더욱 확산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사목을 맡아 신이 났습니다. 사실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일이 생깁니다. 제가, 교회가 다 해결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복음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동행하고…. 힘껏 뛰었습니다. 아쉬운 건 이른바 사회 기득권 세력의 벽이 너무 높다는 것…. 어머니들이 우는 아이만 계속 안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처럼 여러 가지 선택과 활동을 함께 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요.

주교가 되고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주례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교도소였습니다. 견진 대상자들 중에는 연쇄 살인 사건과 연루된 두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시 악명 높은 소위 지존파로 알려진 이들이었습니다.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옮긴 이들이었죠. 하지만 제가 만난 이들은 누구 못지않은 선량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사회교정 역할의 중요성도 다시 느낄 수 있었죠. 이들은 교도소에 들어와 교리를 배우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회심한 그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교도소 생활을 어려워하기는커녕, 태어나 처음으로 의식주를 걱정 없이 해결하고 사람대접도 받았다며 눈물 흘리는 모습에 제 가슴도 먹먹할 지경이었습니다.

안양교도소 견진성사 중 견진자에게 도유하고 있는 모습. 1996년경. 광주대교구 제공

교직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민족화해학교, 참생명학교, 사회교리학교 등 다양한 학교를 열었습니다. 소위 특수사목이라고 하는 분야를 담당하면서,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펼쳐나갈 것들을 평생교육 차원에서 익힐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바로 기도와 교육, 실천이 한데 어우러져 꾸준히 지속되는 장이지요.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수환 추기경님을 대신해 한국교회 고위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사목방문했던 일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왜 북한과 대화하느냐고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북진통일이니 적화통일이니 그런 모습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인데,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해결하면 자연스럽게 다시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가장 먼저 남북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는데, 매주 화요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하는 민족화해 미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금수강산이 묘지강산’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화장(火葬)도 선호하는데 앞장서고,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바로 연결하는 도농직거래를 트고, 빈민사목 지원의 하나로 명례방협동조합을 만들고, 도심 재개발지역에서 밀려난 이들이 임시로 살 수 있는 거주지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일반병원의 원목실을 적극 마련하고…. 세상 속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정말 많았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