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3)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7-13 수정일 2022-07-13 발행일 2022-07-17 제 3303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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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울고 있는 꼬마의 손 잡아준 김수환 대신학생
소신학교 입학 이듬해 6·25전쟁 발발
신학생들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김 추기경 도움으로 대구에서 지내다
낙동강 전선 형성되며 부산으로 피난  

1957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거행된 삭발례. 최창무 신학생도 두발 가운데를 비롯해 십자 모양으로 양옆, 앞뒤 등 다섯 군데를 잘라내는 삭발례를 받았다. 광주대교구 제공

소신학교(성신대학교 부속 중학교)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특히나 물과 불이 부족한 삶이었습니다. 학교에 우물은 하나뿐이었고, 당시 사용하던 북한 전기는 오후 8시면 딱 끊어졌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은 매일 저녁이면 한강으로 나가서 물을 떠와야했고, 전기가 나가면 잉크병으로 만든 등잔에 석유를 넣고 불을 붙여야 했습니다. 우리 반 학생만 해도 60여 명, 공부를 하기 위해 모두가 등잔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정말 엄청나게 생겼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타 지역 사투리도 들었죠. 라틴어도 배우기 시작했고요. 그 시기, 또 하나 인상 깊게 기억나는 일과는 당시 소신학교 성당에 안치된 김대건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매일 저녁 시성을 위한 기도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입학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소신학교가 용산 언덕 지대에 있던 관계로, 6월 28일 새벽 한강 위에 단 하나 세워진 인도교였던 한강대교가 큰 굉음과 함께 섬광 속에서 솟았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후퇴하는 국군은 강가에 있던 소형 배나 끊어진 철교를 통해 도강(渡江)을 해야 했습니다. 많은 신학생들도 그 길을 선택해야 했고요.

상황의 다급함을 감지하신 교장 신부님께선 창고 문을 열어 식량들을 전교생들에게 분배하고 금고의 잔액도 나눠주시면서, 각자 어떻게 해서든 서울을 빠져나가 수원 북수동성당으로 모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곳에 가면 지도신부님께서 다시 인도해줄 거라 하시면서요. 저도 다행히 한강을 무사히 건너 저녁 때 북수동성당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밤샘을 하고 아침이 됐는데도 학생들을 안내할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들 우왕좌왕 혼란 그 자체였죠. 보다 못한 한 대신학생이 나서서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목포 등 이동 방향별로 학생들을 나눠 조를 지어줬습니다. 각 조마다 상급생 한 명을 인솔자로 지정해 주고요. 이어서 신학생들은 각각 자기 집을 향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만 혼자 남은 겁니다. 당황한 제가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대신학생이 다가와 왜 혼자 서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저의 집은 이미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한 파주여서 갈 데가 없다’고 하니, 안타깝게 저를 내려다보다 자신과 같이 가자며 제 손을 꼭 잡아주는 겁니다. 그 손을 잡고 수원병점역까지 갔더니 먼저 도착한 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손과 발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는 사람들이 매달려 있어 그야말로 사람 덩어리였거든요. 먼저 왔던 친구들을 만나, 덕분에 기차 등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갔던 대신학생이 신학생들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졸다가는 기차에서 떨어져 죽을 수 있으니, 서로 꼬집어주면서라도 졸지 않고 가야 한다’고요. 저는 무사히 대구 방향으로 가는 신학생들과 함께 대구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어 대신학생은 저를 대구 남산동에 있는 대구교구청에 데려다주고, 그곳 신부님께 피난 상황을 설명하곤 훌쩍 떠났습니다. 그땐 이름도 몰랐었는데요. 뒤늦게 그 대신학생의 정체를 알게 됐습니다. 그는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 당시 김수환 신부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학위 논문 과정 중에 있단 소식을 듣고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늦게나마 감사드리기 위해서요. ‘그때 북수동성당에서 혼자 울고 있던 꼬마가 바로 저였습니다. 무사히 성장해서 유학까지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그 학생이 바로 자네였나’ 하시며 답장을 보내주셨고, 그 후로도 소식을 몇 번 교환했습니다.

대구교구청에서 저는 미사복사를 서고 잔심부름도 하며 편히 지낼 수 있었는데, 한 달쯤 후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며 대구도 위험할 수 있다고 하여 교구청 당가 신부님께서 저를 경주본당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뒤이어 포항 전선이 무너지고 성당이 학도병 부상자 등으로 가득차자, 경주본당 신부님께선 저를 기차에 태워주시며 부산 중앙성당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며칠 지내다가 대구교구 외 다른 교구 신학생들과 함께 초량에 임시가옥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선배 신학생들은 미군부대 식당이나 적십자병원선 페인트 일 등의 작업을 하며 생계유지에 힘을 보탰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나서야 고향으로 갈 수 있었는데요. 전쟁이 발발한 지 5개월만이었습니다. 고향에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너무나 기뻐하셨죠. 그 시간도 잠깐,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가 시작됐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적군과 국군 사이 전선에서 3개월간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평택까지요. 그러다 충남 성환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게 됐고, 남은 식구들은 피난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전쟁 중이었지만 신학생 양성은 중요했기 때문에 대신학교는 부산에서, 소신학교는 밀양에서 임시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휴전이 되고 나서야 신학생들은 서울 신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