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3)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5-30 수정일 2022-05-31 발행일 2022-06-05 제 3297호 1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예수님께 반해 그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친구의 전사로 마음에 새겨진 한국
해외선교 자원해 6·25전쟁 직후 파견
첫 인상은 “가난하지만 사람들 따뜻해”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로 10년간 사목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던 중 세례식 후 영세자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두 번째 줄 가운데가 두봉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저는 예수님에게 반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사랑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겐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특히 대신학교 입학을 앞둔 고등학생 시절, 종교철학 선생님께서 ‘예수님은 한마디로 사랑이시다. 예수님께선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분’이라고 하신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신부가 됐습니다. 더욱이 선교사제로 살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해주신 더욱 큰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알게 됐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던 그 해입니다. 저는 군복무 중이었는데, 어느 날 상관이 와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전쟁이 나서 프랑스도 파병(유엔군으로)을 하기로 했으니 자원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신학생이었고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에 전쟁을 반대해왔고 자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한국(남한)을 구하기 위해 자원했고 한국 땅에서 전사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마음속에 새겨졌죠.

지난주에 제가 신학생 시절 노동사목을 하고 싶어 했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프랑스에는 평일엔 보통 사람들처럼 노동을 하고 주말에 사목을 나가는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신학교 학장 신부님께선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노동운동 등의 여파로 가톨릭 노동사목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는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지요. 그런데 저는 군복무 시절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도 만나게 됐습니다. 제대를 하고 학장 신부님을 다시 찾아가 해외선교에 관한 의견을 말씀드렸는데, 신부님께선 흔쾌히 찬성하시면서 교구장 주교님께도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길이 열린 것이지요. 게다가 묘하게도 첫 발령지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꿈에도 생각 못해본 일이었지만,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1953년 프랑스 오를레앙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있는 두봉 주교(맨 오른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53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10월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한국까지 가는데 두 달 반쯤 걸렸는데요. 다들 오랜 시간 배를 타면 힘들지 않았느냐고 하시는데, 저는 배를 타는 게 아주 좋았어요. 이집트, 스리랑카, 베트남, 중국, 홍콩, 일본…. 곳곳을 들러 가는 게 좋았죠. 그러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는 배가 없는 거예요. 겨우겨우 화물선을 구해 타고 마산 등을 거쳐 인천항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2월 추운 겨울에 도착했거든요. 참 추웠는데, 보이는 집마다 부서져 있고 덮을 것도 입을 것도 별로 없었어요. 전쟁이 끝난 직후라 모두가 너무 가난했죠. 그런데 다들 마음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누구도 내 것이 부족하니 못주겠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고 쉽게 나누고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그런 모습을 저는 봤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사람들이 참 따뜻하구나’였습니다. 외적인 모습은 ‘정말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라’라는 것이었고요.

몇 달을 서울 용산에 자리한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 있다가 대전교구로 가게 됐습니다. 당시 대전엔 대흥동과 목동, 2개 본당이 있었는데요. 저는 대흥동본당 오기선 신부님을 도와 사목을 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제가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도 미사를 집전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었어요. 그땐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했기 때문이죠.

오 신부님은 강론을 누구보다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한국말을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움도 많이 주셨는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강론을 하면 신부님께서 메모까지 하면서 들어주시고, 끝나면 곧바로 어떤 표현이 틀렸는지, 발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꼼꼼히 짚어주고 바르게 가르쳐 주시는 거였습니다. 점차 한국말이 늘면서 저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학생들도 지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신나게 사목을 하다 보니 10년을 보좌신부로 있었어요. 교구장 주교님께선 저에게 다른 본당을 맡기려고도 하셨지만, 대흥동본당에서 펼쳐놓은 사목이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 신부님은 정말 고집이 센 분이기도 했거든요. 저는 본당 레지오마리애를 창설하고 싶었는데 신부님께선 계속 반대하셨어요. 그리곤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당시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반을 담당하던 어르신을 다시 성당에 모시고 온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르신은 원래 개신교 목사님이셨는데, 개종하시곤 누구보다 성실히 성당에 나오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오 신부님께서 본인이 가르친 예비신자가 준비가 부족하다면서 세례성사를 거절하시자, 신부님께서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생각에 냉담을 하게 된 겁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