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정권의 박해와 고난
북한에서는 공산정권에 의한 종교박해가 점점 심해져 갔다. 평양교구와 덕원수도원에 대한 억압도 심해졌다. 1949년 5월 7일 덕원에서 함흥교구장 겸 덕원수도원자치구장이신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독일인 신부들이 납치되고, 이어서 모든 외국인 신부와 수사들 그리고 한국 신부들까지 다 납치됐다. 수도원과 신학교는 강제 폐쇄됐다. 덕원신학교에 있던 우리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들은 그 길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왔는데, 같은 날 오후에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님이 행방불명(납치)됐다.
우리가 평양주교관으로 가니, 주교님이 안 계신 집에 교구 신부님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주교님이 공석이 되어 교구 책임자가 된 김필현 신부님이 신학생들에게, 각자 재간을 다해 월남을 해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면서 부제 둘(장선흥과 나)에게는 그대로 남아, 신부들이 다 잡혀가게 되면 신자들을 좀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장 부제는 빈집이 된 주교관을 지키기로 하고, 나는 고향 진남포로 내려가 조문국 본당 신부님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안타깝게도 김필현 신부님을 비롯한 다른 신부님들도 하나둘 잡혀가기 시작했다. 김필현 신부님 다음으로 (그와 로마에서 동기였던) 박용옥 신부님이 교회법에 따라 교구 책임을 맡게 됐다. 박용옥 신부님은 이처럼 교구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결국은 신부들이 하나도 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셨다. 우리 두 부제들도 결국 다 붙잡혀가고 말 것이니, 부제 둘도 월남을 해서 신부가 되어 장차 평양교구의 재건을 위해 대비하는 것이 낫겠다며 남쪽으로 피난하라고 하셨다.
■ 1950년 사제서품
1950년 1월, 나는 지학순 신학생(후에 원주교구장 주교가 됨)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월남에 성공하였다.
이어 3월 20일, 나는 서울 대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고향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월남한 신자들과 평양 출신 신우회원들이 성대히 축하해줬다. 첫 소임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중추인 명동본당의 보좌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겨우 3개월, 짧은 기간이었지만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신명나게 사목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