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특집] 꼰솔라따 첫 평신도 해외선교사 송성호·강은형 부부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2-04-05 수정일 2022-04-06 발행일 2022-04-10 제 3289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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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하고 낯선 땅… 우리 안의 주님 사랑 전하려 노력했죠”
순례 마치고 선교사의 길 선택
탄자니아 선교센터 파견된 부부
힘든 생활여건과 문화적 환경
소통과 친교, 기도로 극복
현지 아이들의 순수함에 감동
“값진 체험, 공동체와 나눌 것”

송성호·강은형 부부가 지난 1월 3년여의 계약 기간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열린 학생들과의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송성호씨 제공

이끄심으로 자란 꿈

부부에게 처음부터 큰 원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송성호씨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며 “물 흐르듯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겨 있었고 주님의 이끄심에 의해 자라난 꿈이었다”고 말했다. 부부는 유별나진 않아도 견실한 신앙을 살았다. 수도회를 드나들며 선교교육도 받고 성경공부도 했다.

2010년 수도회 주관 선교지 순례에 참여해 모잠비크를 3주 일정으로 다녀왔다. 2004년에 케냐에서의 경험도 있었다. 이후 몽골과 폴란드, 브라질, 콜롬비아 등 수도회의 선교 지역을 돌아봤다. 여행을 겸했던 순례에서 선교사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씨는 케냐에서 이미 다시 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케냐를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2013년 폴란드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저를 왜 여기까지 부르셨나요?”를 묵상했고, 남편과 평신도 선교사에 대해 의논했다. 남편의 공감과 끌림을 확인한 뒤, 수도회 신부님들과 오랜 식별을 거쳤다.

마침내 결심, 몇 군데 후보지 중 탄자니아 음고응고 선교센터로 목적지를 정하고 2017년 여름 6주간의 사전 답사를 떠나 여전히 남아 있었던 낯선 땅과 소명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냈다.

탄자니아 선교센터에서

그리고 2018년 6월, 부부는 수도회 탄자니아 관구 본부가 있는 이링가시에 도착했다. 현지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익히고 운전면허를 땄다. 넉 달 후 최종 목적지인 음고응고 선교센터로 파견됐다. 탄자니아에는 16개 선교지가 있다. 주로 이탈리아 선교사들이 개척한 본당들이고, 한 곳당 관할 공소가 20~30곳이다. 공소들은 차 안에서도 춤을 추게 만드는 흙길을 짧게는 1시간, 길게는 4시간까지 달려야 닿는다.

이링가시 외곽의 센터는 1994년 보육원으로 시작됐다. 이후 직업기술학교, 보건소가 생겼고, 목공소, 철공소, 목장, 농장, 운전학원이 생겼다. 인근에는 6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 있는데, 대부분 흙집에 살고, 조촐한 농사로 생계를 유지한다. 전기가 들어오는 집은 2곳밖에 없고, TV는 없다.

이곳에서 남편 송성호씨는 회계 등 행정을 담당하고 장을 보러 다녔다. 강씨는 직업기술학교 교감으로 학교 학사 일정을 관리하고 교사와 학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학생들은 대개 가정 형편이 어렵다. 절반이 부모가 없는데다 상당수가 후원단체나 교회의 지원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졸업 때까지도 학비를 내지 못하기도 한다. 학교 시설도 낙후되고 교과서와 책걸상도 부족하다. 건물도 낡아 전기 누전 등 안전사고가 우려된다.

강은형씨가 학생들에게 종교 수업을 하고 있다. 송성호씨 제공

송성호씨가 학생들에게 사회 진출에 필요한 기본 소양을 지도하고 있다. 송성호씨 제공

송성호·강은형 부부가 선교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콜롬비아와 탄자니아 출신의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신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송성호씨 제공

버티기와 기도로

힘들고 어려웠던 일은 셀 수도 없다. 초반에 힘들었던 것은 물리적 환경과 생활 여건이었다. 숙소와 주방, 침실의 쥐와 바퀴벌레들은 적응이 안 됐다. 옥수수가루를 반죽한 우갈리와 나물의 일종인 음보가와 마자니, 그리고 콩류를 삼시세끼 먹어야 하는 식생활도 쉽지 않았다.

환경적인 요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사람과의 관계였다. 문화와 사고방식이 다른 외국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건 척박한 환경이 주는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센터 주방 자매님의 잘못 전한 말로 시작된 책임자 신부와의 갈등은 귀국까지 고민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애를 써도 무너진 신뢰가 회복되지 않았고, 수없이 성당에서 울며 기도를 해도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송씨는 10㎏, 강씨는 6㎏이나 몸무게가 줄었다. 보고와 상담 끝에도 해답은 없었고, 필사적으로 ‘버티기’에 매달렸다. 다행히 책임자 신부의 인사이동으로 갈등은 해소됐고, 외적 여건도 나아져 버티기가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도 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영적인 것이었다.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송씨는 “선교사의 삶을 거룩하고 낭만적으로 여기는 것은 환상”이라며 “무지하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기도로 극복해나가는 것이 선교사의 삶”이라고 말했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보람

영적인 고단함은 나약한 인간성 사이로 침투하는 유혹들에서 기인한다. 사업적 성과, 가시적 결실에 대한 유혹은 이기적 자아 만족으로 이끈다. 그건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다. 그럴듯한 프로젝트로 실적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삶의 소소한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애쓰는 것, 그것이 선교다. 부부가 가장 보람으로 꼽는 일도 사람들과의 소통과 친교, 일치다.

“학생들이 종종 다치는데 보건소에 가면 치료를 할 수 있지만 약통을 들고 제가 직접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그러면서 나누는 소박한 대화와 교감, 그게 선교사의 삶이고 선교하는 모습입니다.”

강씨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받은 짧은 편지를 가장 귀한 선물로 여긴다.

“탄자니아 아이들은 편지를 쓰는 일이 드뭅니다. 누나랑 둘이 사는 한 무슬림 아이가 소박한 사랑의 표현을 담은 편지를 건네주는데,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들이 그 편지 하나로 모두 보상된 것 같았습니다.”

송씨는 “선교사로 사는 삶이 어렵다는 건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사랑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며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내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선교나 복음, 봉사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기억을 나누고 이끄심에 기대어

계약 기간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지난 1월, 일단은 훗일을 고민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추스를 예정이다. 우선 기억을 나눌 생각이다.

“선교사로 파견됐다가 돌아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기억’을 나누는 일이라고 해요. 하느님의 일에 대한 기억, 그 일의 보람과 기쁨을 선교사를 파견한 공동체 전체와 함께 나누는 거죠.”

다음으로 부부는 일단 좀 쉬면서 “아프리카를 간 것이 주님의 이끄심이었듯이 돌아갈 고민도 그분께 맡긴다”며 “다시 가긴 갈 것 같다”고 웃었다.

평범한 신앙인이었던 부부는 자신들의 체험을 더 많은 이들이 공유하기를 희망했다.

“많은 이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의 허무를 느끼거나 참된 삶의 의미를 고민합니다. 봉사와 기도에 좀 더 열심하기를 원하기도 하지요. 그런 분들에게 해외 평신도 선교사의 체험을 권합니다. 60세도 많은 나이가 아닙니다. 건강하기만 하면, 현지에서는 젊은이가 왔다고 좋아할 겁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