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에세이] 삶이란 그릇을 씻으며 / 김주후

김주후 요한보스코,제1대리구 동백성마리아본당
입력일 2022-03-30 수정일 2022-03-30 발행일 2022-04-03 제 3288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언제부터인가 일상생활 속에서 재미를 붙인 일 중 하나가 설거지다. 요리 실력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설거지라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이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자 스스로 즐기는 일이 되어버렸다.

설거지가 하루의 일과 중 중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일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내와 나는 아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설거지가 단순히 그릇 씻는 일에서 벗어나 내 삶의 새로운 기초를 만들어 준 일이 된 사건이었다.

아내: 설거지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당신이 하나 잊고 있는 게 있어.

나: 그게 뭔데?

아내: 여기 아침에 이미 씻어서 올려놓은 접시나 그릇이 보여?

나: 보이지. 오늘도 여러 번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증거인가?

아내: 중요한 건 설거지하기 전에 그 그릇들부터 먼저 치우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새로 씻은 그릇을 올려놓기가 어려워.

나: 먼저 씻어놓은 그릇부터 정리하고 설거지하기?!!

설거지를 시작하기 전에 이전의 그릇부터 정리하라는 권고는 이후 내 삶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실제로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될 때, 이미 내 안에 자리한 지식이나 경험 등을 먼저 치우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내용임에도 새롭게 다가오지 않고 설사 들어와도 자리를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지나온 신앙의 여정도 돌아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 유아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달려온 이 길에서 그나마 젊은 시절에 간직했던 그 열정과 신선함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일종의 매너리즘은 물론 심지어는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다는 식의 자만심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다시 내 삶 속으로 녹여 넣는 일이 쉽지 않다. 그저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누적된 그 무엇을 제대로 치우고 덜어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일까?

이제 나에게 설거지는 단순히 손으로 그릇을 씻는 일은 아니다. 내 삶이란 그릇을 살피고 닦아내어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 반짝이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은 무조건 씻는 일부터 시작하지 말고 이미 쌓인 그 무언가부터 정리하는 것이다.

맛있게 먹고 난 그릇은 싹싹, 씻은 그릇은 선반에 척척, 먼지 쌓인 내 마음도 쓱쓱.

김주후 요한보스코,제1대리구 동백성마리아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