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수: 당시 선교사의 의식에 대해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당시 경향신문을 보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논설이 있는데, 굉장히 호평하고 있다. 당시 경향신문사 사장이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이기도 한 드망즈 플로리아노 주교다.
▲조 교수: 안 의사가 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빌렘 신부의 결단 덕분이었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1년 5월 11일자 서신에서 “주교님께서 저에게 안중근에게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원인 무효에 해당한다”며 1638년 발표된 포교성성 칙령을 근거로 든다. 칙령에는 사제가 없는 지역에서 모든 선교사는 1주일 동안 선교사 직능, 권한을 다 행사해도 된다는 내용이 있다고 빌렘 신부는 주장했다. 빌렘 신부가 뤼순으로 떠나는 1910년 3월 당시에도 뤼순을 기준으로 240㎞ 범위 안에는 사제가 없었다고 한다.
■ 복권에 대하여
-장 국장: 하얼빈 의거 직후 뮈텔 주교는 안 의사가 가톨릭신자임이 드러나자 ‘살인 행위’로 단죄했다. 또한 “안중근이 살인자로서의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공적인 표지를 보이지 않는 한 가톨릭교회의 자녀로서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천명했다. 당시 조선교회 최고 책임자의 언급이므로, 안 의사를 파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1993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안 의사의 복권을 의미하는 발언을 했고, 2009년 후임 교구장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도 김 추기경의 말씀을 재확인하는 차원으로 안 의사에 대해 언급했다. 일반적으로는 김 추기경의 말씀이 한국교회의 안 의사에 대한 복권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다.
▲조 교수: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봐야 하겠다. 뮈텔 주교가 안 의사를 구두로 단죄했다기보다는 안 의사의 행위를 자동파문 규정으로 파악을 한 것이다.
이것은 예전 기준으로 본다면 ‘기절벌’(棄絶罰) 조항을 어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안중근의 전기에 보면 원산본당의 브레 신부가 성사를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사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 ‘안중근이 독립운동이라는 정치활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동파문, 기절벌이다.
그런데 안 의사가 자동파문에 의한 파문자로 규정됐다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자동파문에 해당하는지에 관해서는 교회법적 근거가 없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년)의 결정을 반영해서 1914년에 교회법을 개정했다 하더라도, 개정 이전에 그러한 자동파문에 관한 법적 관행이 있었다는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이 잘못 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동파문 문제가 먼저 논의되고 그 다음에 복권 문제가 나오는 것이 순서일 텐데, 파문에 대해서는 지금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다. 이 점을 먼저 밝혀나갈 필요가 있다.
▲방 신부: 주교회의는 2000년 11월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다. 그 문건은 2항에서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특정인(안중근)을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뭉뚱그려서 그렇게 표현을 했다.
▲이 교수: 1946년 3월 26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안 의사 추모 대례미사가 봉헌됐다. 그러나 이때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노 대주교는 1979년 9월 2일 안중근 탄생 100주년 미사를 봉헌하면서 “안 의사의 의거는 사사로운 원한이 아니라 조국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기록이 있다.
■ 시복 가능한가
-장 국장: 안 의사를 복자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예전부터 제기돼 오고 있다. 시복의 필요성과 그 추진방법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방 신부: 안 의사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안 의사가 순교자라고는 할 수 없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목숨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증거자냐. 이것을 교회법적으로 접근해보면 증거자 쪽이 더 우세한 것 같다. 가해자인 일본이 신앙 때문에 안 의사를 사형시켰다면 간단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빌렘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일본은) 허용을 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신앙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교수: 저 역시 안 의사의 시복은 증거자로서 안 의사를 현양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가톨릭 문인이자 평화의 사도였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져 숨진 신자들에 대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의한 희생자로 봤다. 안 의사도 동양의 평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면 일제에 의해 안 의사가 추구했던 하느님의 정의 실현이 차단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고 순교자적인 면모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조 교수: 저도 증거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데 동의를 한다. 그런데 순교에 대한 개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분을 ‘사랑의 순교자’로 규정하셨는데, 순교의 개념이 신앙뿐만 아니라 신앙의 핵심인 사랑을 증거하는 것도 순교로 본다는 것이다. 독일 주교단은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 2명의 시복을 건의해 관철시킨 바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사랑의 순교’라는 개념은 상당히 널리 적용되고 있다. 안 의사의 행동에도 이러한 평가를 참조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