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특별 좌담] 신앙인 안중근과 시복

정리 우세민 기자
입력일 2022-03-15 수정일 2022-03-17 발행일 2022-03-20 제 3286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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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신앙 기초로 활동… 교회도 “의거는 정당방위” 인정
민족 사랑으로 신앙 증거… 삶과 신앙 알리는 노력 시급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안중근 의사 좌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토마스·1879~1910)의 순국 112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영웅이면서 가톨릭신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시복’이 필요하다는 언급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신자로서 안 의사의 삶과 영성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교회 내 관심 또한 부족하다.

가톨릭신문은 안중근 의사의 삶과 신앙을 고찰하면서 과연 그가 복자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신앙의 모범인지 살펴보고, 시복을 위한 노력의 불씨를 당길 수 있는 좌담을 마련했다.

진행: 장병일(바오로) 편집국장

일시: 2022년 3월 10일 오전 11시

장소: 서울 동자동 서울역사 회의실

(왼쪽부터)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장, 안중근바보장학회 대표 방상만 신부, 이경규 전 대구가톨릭대 안중근연구소장, 장병일 본지 편집국장이 3월 10일 서울역사 회의실에서 안중근 의사 시복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사진 우세민 기자

■ 안중근의 신앙

-장병일 편집국장(이하 장 국장):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신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안 의사의 가족 또한 모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다고 알고 있다. 그들의 신앙적 면모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이경규 교수(이하 이 교수):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역사」에는 그의 신앙에 대해 언급된 내용이 많다. 그것만 보더라도 안 의사의 모든 행적에는 신앙이 바탕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안 의사의 가족들은 1897년 함께 영세했다. 안중근은 이때 도마, 즉 토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을 집전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빌렘 신부와 안 의사 가족과의 인연이 이때 시작된다. 이후 안 의사는 교회 일에 헌신했다. 빌렘 신부의 복사를 서기도 하고, 선교 활동과 공소 방문 등을 하면서 신앙을 키워갔다.

안 의사는 의병 전쟁 중 두 부하에게 대세를 주고, 옥중에서는 장남 안문생(베네딕토)이 신부가 되게 해달라고 모친과 아내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완이지만 공정과 정의가 바탕인 하느님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얼빈 의거를 감행했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조광 교수(이하 조 교수): 1946년 당시 교회 유일의 출판사인 경향잡지사에서 「독립선구 안중근 선생 공판기」라는 책을 간행했다. 책의 부록에는 안 의사가 의병 전쟁에 참여했을 때 배낭에 교회서적을 넣고 다녔다든지 매일 조·만과(아침·저녁기도)와 묵주신공을 바쳤다는 가족의 증언이 실려있다. 빌렘 신부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안 의사는 철저히 신앙을 기초로 활동했다.

▲방상만 신부(이하 방 신부): 안 의사가 신앙적으로 가장 단단해진 것은 빌렘 신부의 복사를 서며 동행한 덕분이었다. 그와 수개월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고, 국제적 안목을 키우는 데도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일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안 의사를 찾아가 종부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했다. 인간적으로 상당히 총애했을 것이다.

방상만(베드로) 신부 - 안중근바보장학회 대표이사

■ 빌렘 신부의 영향

-장 국장: 빌렘 신부는 안 의사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볼 수 있다. 빌렘 신부는 안 의사의 신앙을 높이 평가했고, 뮈텔 주교의 반대도 무릅쓰고 성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안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에 반대했다. 빌렘 신부가 안 의사의 활동을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

▲방 신부: 많은 분들이 지적하기에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정교분리 원칙에 의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선교’의 개념이 지금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교는 그 지방의 국가적 상황이나 사회, 문화, 종교 등을 모두 고려해 맞춰 가는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조선인들의 나라 빼앗긴 아픔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 - 前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조 교수: 빌렘 신부의 서한을 보면 그는 철저히 19세기 선교신학에 입각해 활동을 했던 분이었다. 우선 ‘영혼구령’(靈魂救靈)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생각했다. 빌렘 신부는 전통적인 선교신학의 입장에서 안 의사의 영혼구령에 1차 목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빌렘 신부가 프랑스로 돌아간 뒤 그곳에서 한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분명히 그는 안 의사의 항거를 통해 자신의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서 파리에서 맺어진다. 조선 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김규식 등이 파리로 파견된다. 그들은 뉴스레터를 만들었는데, 그 작업을 빌렘 신부가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경규(안드레아)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 前 대구가톨릭대 안중근연구소 소장

▲이 교수: 당시 선교사의 의식에 대해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당시 경향신문을 보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논설이 있는데, 굉장히 호평하고 있다. 당시 경향신문사 사장이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이기도 한 드망즈 플로리아노 주교다.

▲조 교수: 안 의사가 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빌렘 신부의 결단 덕분이었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1년 5월 11일자 서신에서 “주교님께서 저에게 안중근에게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원인 무효에 해당한다”며 1638년 발표된 포교성성 칙령을 근거로 든다. 칙령에는 사제가 없는 지역에서 모든 선교사는 1주일 동안 선교사 직능, 권한을 다 행사해도 된다는 내용이 있다고 빌렘 신부는 주장했다. 빌렘 신부가 뤼순으로 떠나는 1910년 3월 당시에도 뤼순을 기준으로 240㎞ 범위 안에는 사제가 없었다고 한다.

■ 복권에 대하여

-장 국장: 하얼빈 의거 직후 뮈텔 주교는 안 의사가 가톨릭신자임이 드러나자 ‘살인 행위’로 단죄했다. 또한 “안중근이 살인자로서의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공적인 표지를 보이지 않는 한 가톨릭교회의 자녀로서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천명했다. 당시 조선교회 최고 책임자의 언급이므로, 안 의사를 파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1993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안 의사의 복권을 의미하는 발언을 했고, 2009년 후임 교구장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도 김 추기경의 말씀을 재확인하는 차원으로 안 의사에 대해 언급했다. 일반적으로는 김 추기경의 말씀이 한국교회의 안 의사에 대한 복권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다.

▲조 교수: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봐야 하겠다. 뮈텔 주교가 안 의사를 구두로 단죄했다기보다는 안 의사의 행위를 자동파문 규정으로 파악을 한 것이다.

이것은 예전 기준으로 본다면 ‘기절벌’(棄絶罰) 조항을 어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안중근의 전기에 보면 원산본당의 브레 신부가 성사를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사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 ‘안중근이 독립운동이라는 정치활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동파문, 기절벌이다.

그런데 안 의사가 자동파문에 의한 파문자로 규정됐다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자동파문에 해당하는지에 관해서는 교회법적 근거가 없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년)의 결정을 반영해서 1914년에 교회법을 개정했다 하더라도, 개정 이전에 그러한 자동파문에 관한 법적 관행이 있었다는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이 잘못 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동파문 문제가 먼저 논의되고 그 다음에 복권 문제가 나오는 것이 순서일 텐데, 파문에 대해서는 지금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다. 이 점을 먼저 밝혀나갈 필요가 있다.

▲방 신부: 주교회의는 2000년 11월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다. 그 문건은 2항에서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특정인(안중근)을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뭉뚱그려서 그렇게 표현을 했다.

▲이 교수: 1946년 3월 26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안 의사 추모 대례미사가 봉헌됐다. 그러나 이때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노 대주교는 1979년 9월 2일 안중근 탄생 100주년 미사를 봉헌하면서 “안 의사의 의거는 사사로운 원한이 아니라 조국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기록이 있다.

■ 시복 가능한가

-장 국장: 안 의사를 복자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예전부터 제기돼 오고 있다. 시복의 필요성과 그 추진방법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방 신부: 안 의사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안 의사가 순교자라고는 할 수 없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목숨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증거자냐. 이것을 교회법적으로 접근해보면 증거자 쪽이 더 우세한 것 같다. 가해자인 일본이 신앙 때문에 안 의사를 사형시켰다면 간단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빌렘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일본은) 허용을 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신앙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교수: 저 역시 안 의사의 시복은 증거자로서 안 의사를 현양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가톨릭 문인이자 평화의 사도였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져 숨진 신자들에 대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의한 희생자로 봤다. 안 의사도 동양의 평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면 일제에 의해 안 의사가 추구했던 하느님의 정의 실현이 차단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고 순교자적인 면모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조 교수: 저도 증거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데 동의를 한다. 그런데 순교에 대한 개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분을 ‘사랑의 순교자’로 규정하셨는데, 순교의 개념이 신앙뿐만 아니라 신앙의 핵심인 사랑을 증거하는 것도 순교로 본다는 것이다. 독일 주교단은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 2명의 시복을 건의해 관철시킨 바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사랑의 순교’라는 개념은 상당히 널리 적용되고 있다. 안 의사의 행동에도 이러한 평가를 참조할 수 있겠다.

러시아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세워진 단지동맹기념비. 안중근과 항일의 뜻을 같이 하는 11명은 1909년 3월 이 자리에서 왼손 넷째 손가락(무명지) 첫 관절을 자르고,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의 헌신을 다짐했다.

■ 어떤 노력 필요한가

-장 국장: 안 의사에 대한 연구는 사실 지금까지도 많이 이뤄졌지만, 오늘 이 자리가 안 의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 앞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안 의사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교회의 지속적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방 신부: 교회 밖에서는 안 의사에 대한 연구와 문화사업이 다양하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에 비해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열악하고 나서는 사람도 없다. 신자들조차도 안 의사에 대해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우선 신자들에게 안 의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묵주기도 운동과 같은 신심활동도 필요하다. 알려야 한다는 점에서, 성직자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안 의사의 신앙심과 관련된 연구도 활발하게, 지금보다 더 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조 교수: 한국 사학계 혹은 한국 국민의 평가보다 교회의 평가가 좀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복의 조건 중에는 그에 대한 명성을 조사한다. 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가, 긍정적으로 인식하는가에 대한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안 의사를 현양하고 높이는 방법은 교회가 나름대로 더 선제적으로 해야 한다. 교회 기구에서는 그런 뚜렷한 노력들이 별로 진행이 안 되고 있다. 당장 시복을 추진하자는 것보다는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아직 우리 교회에는 더 필요하다.

▲이 교수: 코로나19로 중단됐지만, 대구에서는 몇 년 전부터 지역을 중심으로 안 의사의 순국일을 전후로 한국·중국·일본 사람들이 함께 추모미사를 봉헌해왔다. 2019년에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안중근연구소가 세 나라의 청년들과 함께 ‘동양평화캠프’를 개최한 바 있다. 이런 움직임이 교회 안에서 좀 더 확산되면 좋겠다.

-장 국장: 이제 교회 안에 있는 안 의사 관련 기관·단체들이 힘을 결집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국적으로 통합 모임이나 조직을 구성해 안 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두 모여 대대적으로 시복에 대한 논의를 해볼 수 있겠다.

▲이 교수: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구를 위해서는 서로 제휴가 되고 정보를 교환했으면 한다. 교회에서 안 의사를 현양하는 노력이 굉장히 중요한데, 국가보훈처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분이 바로 안 의사라고 한다. 결과가 압도적이다.

▲방 신부: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된 상태이고, 전 세계적으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평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동양평화사상의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 특히 안 의사의 모범적인 신앙의 모습이 신자들에게 귀감이 될 텐데, 많은 분들이 너무나 모르고 있다. 오늘날 안 의사와 같은 분이 필요함에도 소외되고 무관심하게 돼 안타깝다. 교회 자체적으로 신자들에게 안 의사를 소개하고 삶과 신앙에 대해 나누면 시복도 좀 더 빨리 실현될 것이다.

▲조 교수: 각 단체들 사이의 유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연구를 할 때 정보를 나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장 국장: 귀한 말씀 감사드린다. 오늘 이 자리가 안 의사의 가톨릭 신자로서 면모를 다시 한번 살피고, 시복에도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여기 모인 분들뿐 아니라 독자들께서도 더 많은 관심으로 마음 모아주시기를 바라본다.

정리 우세민 기자 semin@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