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에세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윤길운

윤길운 사비나,제2대리구 안양비산동본당,
입력일 2022-03-02 수정일 2022-03-02 발행일 2022-03-06 제 328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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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외출하고 돌아오는데 아파트 경비실에서 우리 집을 가리키며 빨리 오라고 다급하게 불렀다. 올려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베란다 창문으로 새까만 연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급히 집으로 가려는데, “올라가면 안 된다”며 모여 있던 이웃들이 “큰일난다”고 붙잡았다. 소방차가 와서 화재를 진화한 뒤 가서 보니 집안 살림이 다 타고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현기증도 나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넋을 잃고 있는데, 옆동에 사시는 어르신 아녜스 자매님이 “우리 집으로 가자”며 이끄시는 것이었다. 그 자매님이 저녁을 차려 주며 하시는 말씀이 “집이 정리될 때까지 우리 집에서 내 집처럼 아무 부담 갖지 말고 살아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조그만 것이라도 건질 것이 있을지 찾아보려 재로 변한 집에 갔는데 안방에서 매일 기도를 바칠 때 보던 성무일도서와 예수성심상, 성모상이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더구나 기도서 책갈피 위로 이튿날 거행될 중요한 미사 입장권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모으며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잿더미 속 집안을 보름 동안 정리했다. 그 기간 동안 우리 몸에서는 탄내가 진동하고 까만 재도 여기 저기 묻어났다. 그런데도 아녜스 자매님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고 이불을 내어 주시고 밥도 해주셨다. 또 함께 기도해 주시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친정 엄마처럼 자상하게 돌봐주시면서 쌀도 반찬도 일체 사오지 못하게 하시며 말없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베푸셨다. 그 외에도 많은 본당 신자들과 친지들이 도움을 주고 기도해 주며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

이렇게 사랑을 받으며 수습한 가재도구를 꾸려 이사를 했는데, 가전제품 수리 기사분이 일이 끝나도 가시지 않고 무언가 의아해 하시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더 남은 일이 있으신가요?”하고 물으니 멋쩍은 모습으로 “그런데 불난 집 아주머니 맞습니까?”했다. “왜 그러시는데요?”하니 “보통 불난 집 가보면 주인들이 머리 싸매고 누워 있는데 밝게 웃고 있으니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저 높은 데 계시는 하느님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렇게 삽니다. 성당에 다니거든요”라고 얘기했더니, 그는 “그래서 밝은 모습인 것 같다”며 “언젠가는 꼭 성당에 나가고 싶다”고 답했다.

그렇다. 이렇게 시련을 딛고 밝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느님의 축복과 신자분들 보살핌, 또 기도와 사랑 덕분일 것이다. 그때 사랑으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매일 기도할 때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윤길운 사비나,제2대리구 안양비산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