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 (5)원주교구 풍수원성당과 역사관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입력일 2022-03-02 수정일 2022-03-02 발행일 2022-03-06 제 328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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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 뾰족 첨탑에는 선조들 신앙 깃들어 있네

강원도에 지어진 최초의 성당
세 번째 한국인 사제 정규하 신부
47년 동안 한평생 바쳐 사목한 곳

풍수원성당 외부 전경. 성당 앞마당에는 초기 풍수원성당을 재현한 초가집이 지어져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풍수원성당을 찾았다.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원주와 춘천교구의 모태인 이곳은 깊은 산속에 있지만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조차도 아름다운 풍광과 성당을 둘러보기 위해 찾는 곳이다.

풍수원(豐水院)은 ‘물이 풍부한 곳에 있는 관청’이란 뜻으로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다. 역(驛)은 고려·조선시대에 말을 갈아타거나 쉬게 하던 곳이고, 원(院)은 관원들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신태보(베드로, 1769?~1839)가 용인, 이천 지역의 순교자 유가족 40여 명과 함께 피신처를 찾아 떠돌다가 풍수원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옹기를 구워 팔며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첫 자리에 두고 열심히 기도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여기며 보듬어주었다. 박해가 계속되자 많은 교우들이 풍수원으로 숨어들면서 점점 큰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곳 교우들은 성직자도 없이 80여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중 한불수호통상조약(1886년)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뒤 1888년 본당이 설립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초대주임 르 메르 신부(Le Merre, 1858~1928, 파리외방전교회)에 이어서 1896년 2대 본당 신부로 정규하 신부(아오스딩, 1863~1943)가 부임하여 1943년 선종할 때까지 47년 동안 이곳에서만 한평생 사목하였다.

정규하 신부는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어서 세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다. 1896년에 강도영, 강성삼 신부와 함께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거행된 사제서품식이었다.

초창기 풍수원에서는 초가집 여러 채를 이어 성당으로 사용하다가 신앙 공동체가 커지자 성당 건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1907년 정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인 중림동약현성당처럼 짓기 위해 벽돌공을 찾다가 명동성당 건축에 참여한 중국인 진 베드로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와 벽돌공을 불러서 뒷산에 있던 흙으로 벽돌을 구우며 아름다운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화전민이었던 교우들은 주변의 나무를 목재로 다듬고 벽돌을 머리에 이고 나르며 온갖 기도와 정성을 쏟아 부었다.

풍수원성당 내부.

마침내 1910년에 우리나라 사제가 설계하고 감독하여 지은 최초의 성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이 완성되어 성대한 축복식을 열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인 성당의 전면 가운데는 우뚝 솟은 종탑이 있고 내부 신자석은 세 부분으로 정갈하게 꾸며졌다. 2020년에는 추상과 구상의 유리화(최성호 제작)가 설치되었는데 구상화에는 구약과 신약의 주요 내용을 담았다. 제단에는 오래전에 사용하던 목조 제단과 현재 사용하는 제단이 함께 있어서 풍수원성당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당 앞마당에는 작년에 지은 초가집이 한 채 있다. 이것은 지금의 성당이 있기 전에 사용했던 초기의 초가집 풍수원성당을 재현한 것이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로 성장한 신앙 공동체의 변모 과정을 보여준다. 성당 입구에는 1910년 건립 당시에 심었던 두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도 있다. 마치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을 보는 것 같다.

성당 왼쪽에는 고풍스런 2층의 벽돌조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성당 역사관이다.(등록문화재 제163호) 원래 이 건물은 1912년에 건립되어 사제관으로 이용하면서 1층은 산골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 ‘삼위학당’으로도 사용하였다. 또한 정규하 신부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동정녀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을 돌보며 사목하였다. 1997년 이후에는 사제관을 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면서 320여 점의 유물 가운데서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성당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물과 자료, 정 신부가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 오래된 신앙 도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당 왼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십자가의 길 14처(이철수 판화가 제작)가 있으며 높은 곳에는 성체현양동산이 있다. 이곳은 해마다 개최되는 성체현양대회 때 성체강복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정규하 신부는 1920년부터 6월 예수성심성월 중 성체성혈대축일에 힘든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위해 성체현양대회를 시작하였다. 동산에는 풍수원에서 헌신적으로 사목한 정 신부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

성당 뒤편에는 넓은 성모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성체현양대회 미사를 봉헌한다. 그리고 장엄한 행렬을 지어서 성체현양동산으로 올라가서 성체강복을 한다. 성모동산 곁 횡성군에서 만든 유물전시관에는 생활용품 등 다양한 민속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주변에는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주요 생활수단이었던 옹기와 가마터, 초가집과 쉼터가 있다.

우리에게 풍수원성당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정규하 신부가 쓴 사목 서한집 덕분이다. 「풍수원에서 온 편지」(2019년,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간행)에는 정 신부가 1896년부터 1929년까지 교구장 주교에게 보낸 114편의 편지와 사진이 있다. 아버지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던 교우와 지역 사람들을 돌보며 사랑한 착한 목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지막한 산과 얕은 개울, 작은 마을과 초가집, 우뚝 솟은 뾰족 성당과 역사관, 느티나무와 소나무 숲, 오솔길과 수목원, 성체현양동산과 성모동산, 성모상과 예수성심상, 그 모든 것이 지난날의 정겨운 고향과 신앙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100년도 훌쩍 넘은 사제관 앞에는 이곳에서 한평생을 사목한 착한 목자 정규하 신부의 흉상이 있다. 그 상에 손을 대니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온기가 전해져 온다. 아버지처럼 다정한 신부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오시는 것 같다.

풍수원성당 역사관 전시물.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