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내 삶의 보물 / 고영초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입력일 2022-02-28 수정일 2022-03-02 발행일 2022-03-06 제 328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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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진행자는 나를 ‘숨어 있는 교회의 소중한 보물’이라 소개하면서 프로그램을 시작해 말미에는 내게 ‘내 삶의 보물과 신앙의 보물’에 대해 물었다. 보물이라고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없어 망설였는데 이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고 싶었는데, 소망과 달리 의사가 되어 48년 동안이나 의료 봉사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계기들이 나의 보물들이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한 복사를 통해 키운 사제의 꿈은 나의 첫 번째 보물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 겪은 4·19 혁명에서 내가 길을 잃었던 것은 내가 사제의 길로 접어든 두 번째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오전반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데모 구경을 하느라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었고, 집은 청량리였는데 용산 삼각지 부근에서 계엄 사이렌을 들었다. 두려움에 떨면서 울고 있던 나를 골목으로 급히 들어가던 어떤 분이 하숙집에 데려가 씻기고, 먹이고, 재워 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날 집에 데려다주고는 부모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황급히 사라지셨다. 당시 청량리본당 회장이셨던 아버님께서는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고 나를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하셨다.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부가 되고 싶었던 나는 1965년에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소신학교에서는 전교생 350여 명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방학 때만 집에 갈 수 있었고, 일주일에 두 번 면회가 가능했다. 나는 겨울에 찬물로 씻어야만 하는 것 말고는 기숙사 생활이 참 좋았다. 규칙을 잘 지켰고 공부도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어 참 좋았다.

교과 과정은 일반 학교에 비해 영어, 체육, 음악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중학교 2학년부터는 라틴어를 배웠다. 영어 선생님은 신부님이셨는데, 열정적으로 가르치셔서 중학생 시절에 고등학생들보다도 더 많은 어휘력을 갖출 수 있었다. 라틴어를 배우면서 어원을 알게 되니 어휘력이 쑥쑥 늘었다. 그런데 예비고사 제도가 도입되고 선배들의 예비고사 합격률이 매우 저조한 것을 알게 되면서 일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의 이런 바람은 고2 겨울방학 중에 신일고등학교에서 3학년을 편입 시험으로 뽑는다는 기사를 통해 실현되었다. 마음 편하게 응시했다가 합격하는 바람에 갑자기 신일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입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몹시 힘들었으나, 라틴어로 독일어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어 독일어와 전 과목 시험을 치르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입학시험에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다.

라틴어는 의학을 공부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의학용어 절반 이상이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었다. 의학 공부를 하면서 주말마다 의료 봉사 동아리를 이끌면서 봉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소신학교 기숙사 생활 5년을 통해 얻은 보물들 덕분이었다. 의료 봉사 활동은 처음엔 하느님께 대한 미안함에서 시작되었지만, 불가능할 것 같았던 나의 의대 입학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기묘한 방법으로 나를 처음부터 의사로 이끄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관점으로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한 나의 신앙의 관점 또한 내 삶의 보물이다.

고영초 가시미로 건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