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중)

이재훈 기자
입력일 2021-12-29 수정일 2021-12-29 발행일 2022-01-02 제 327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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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기틀 다지는데 큰 기여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순교성인 10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파리외방전교회의 아시아 선교 열망에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당시 태국 시암대목구 보좌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을 준비하던 중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선종했다.

그를 이어받아 모방 신부가 권한을 위임받은 부주교 자격으로 1835년 말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첫 목표인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해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 신학교에서 교육시켰다. 이를 통해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배출됐다. 1837년에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엥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가 차례로 조선에 입국했다.

현지 신학교 설립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855년 제천에 배론 신학교를 시작으로 1885년에는 원주 부엉골 신학교를 세웠다. 이는 1887년 서울 용산 신학교로 자리 잡았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 내 천주교 포교의 자유를 얻은 뒤 확대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90년 조선 내 22명의 회원이 활동했으나 이후 10년 만에 41명으로 회원이 크게 늘었다.

1911년에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교황청에 분할을 요청해 승인받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로 이름을 바꾸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떼어 대구대목구를 신설했다. 신자 수 7만6000여 명, 선교사 48명, 현지인 성직자 21명으로 교세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초대 대구대목구장에는 드망즈 주교가 임명됐다. 1920년에는 함경도와 서북부 평안도 지역 사목을 위해 이 지역을 서울대목구에서 분리해 원산대목구를 새로 설립하고 베네딕도회에 위임했다.

이러한 대목구 및 지목구 제도는 일제 해방 후인 1962년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며 그대로 이어졌다. 이렇듯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교회가 설립된 이래 그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에 많은 성당을 건립하고 사목하는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1890년 주교좌명동대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 1906년 하우현성당을 건립한 샤플랭 신부, 1900년 안성성당을 세운 하느님의 종 앙투완 공베르(Gombert Antoine, 1875~1950) 신부 등 많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에 성당을 세우고 현지 사목에 힘썼다.

이재훈 기자 steelheart@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