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가난한 과부의 아낌없는 마음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입력일 2021-11-02 수정일 2021-11-02 발행일 2021-11-07 제 326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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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제1독서(1열왕 17,10-16) 제2독서(히브 9,24-28) 복음(마르 12,38-44)
부자들이 헌금하는 ‘큰돈’보다는 어려운 이들의 정성이 더욱 소중
교만과 위선의 행실을 떨쳐버리고 주님의 은총 깨닫고 자선 베풀길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한 주 앞둔 연중 제32주일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성사를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진실한 믿음과 아낌없는 사랑을 봅니다. 우리의 자발적 희생과 봉사하는 삶이 성령의 도움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기원전 9세기)는 바알(Baal) 신을 섬겨 하느님을 거스른 아합왕에게 극심한 가뭄을 예언합니다. 그는 요르단강 동쪽 크릿 냇가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까마귀가 날라주는 빵과 고기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1열왕 17,1-7). 냇물이 마르자 주님 말씀대로 사렙타(시돈의 남쪽)로 가서 땔감을 줍고 있는 한 과부에게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제1독서)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굶주린 과부는 단지에 남은 밀가루 한 줌과 병에 조금 남은 기름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 했다가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진 것을 모두 바칩니다. 엘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간절한 기도는 밀가루 단지가 비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신뢰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십자가 희생제물로 바치신 뒤, 말씀대로 부활하시어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제2독서)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 죽음을 맞습니다. 지상 여정의 끝인 죽음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소명을 다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자비를 누리는 시간의 끝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고대합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참 사제가 된 신부는 축성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를 사목하며, 성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신비를 베푸는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신자의 예물을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에 결합해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하느님께 감사 제사를 올립니다.

프랑수아 조제프 나베 ‘가난한 과부의 헌금’(1840년).

평신도는 사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삶으로 주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 속에 가난한 마음으로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들은 기도와 성사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사도직을 수행하며 성덕의 길로 나아갑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들은 모세율법의 전문가로 산헤드린의 구성원이고, 하느님 말씀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가르치기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율법학자들을 조심”(마르 12,38)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긴 겉옷을 입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모임 때 윗자리를 차지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하는 그들의 교만과 위선의 행실을 따르면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보십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습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습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 화폐가 유통되던 당시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으로 노동자 하루 임금의 백분지 일에 불과합니다. 부자들이 넣는 큰돈은 여분의 돈이지만 과부의 것은 생활비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율법학자들은 성전헌금이 가난한 이들에게 재분배된다고 가르칩니다. 눈에 띄는 그들의 긴 겉옷과 연회를 보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모습입니다.”(마르 12,40) 풍족한 데서 얼마씩 기부하는 부자나 율법학자에게 동전 두 닢은 보잘것없지만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주님께 바치는 모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이 과부보다 더 봉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성 아우구스티노)

생계의 바탕인 남편을 잃은 과부는 가난하고 무력합니다. 상속에서도 제외되어 있기에 아들이 없으면 친정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레위 22,13; 룻기 1,8)입니다. 매일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그녀가 소유한 전부를 바치고 빈손으로 살아가는 과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빛입니다.

가난한 과부와는 달리 우리는 모든 것을 내놓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아낌없는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소중히 간직한 것을 정성껏 봉헌하면서 ‘가난의 찬미가’를 불러보면 어떨까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은 사랑입니다. 그들을 돌봐주는 자선은 주님께 베푼 것이기에 교회의 변함없는 전통입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성령의 감도인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양심을 가꾸어 나가는 그리스도인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비하신 주님, 저희의 행실이 율법학자들의 모습으로 보일 때, 그것은 제자의 길이 아님을 일러주소서. 저희가 사랑 없이 가진 것을 봉헌하기보다 사랑을 체험하고 감사하는 비움의 은총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