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85) 세상 한가운데서 거룩함을 산다는 것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
입력일 2021-09-07 수정일 2021-09-07 발행일 2021-09-12 제 3261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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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삶,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이자 초대

오늘도 정신없이 일하다가 퇴근을 했다. 낮 시간 업무 관계로 동료와 신경전을 벌인 것이 찜찜했다. 집에 오니 아내가 막내를 씻기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직장 업무에 많이 시달렸을 텐데, 집에서 또다시 전력 질주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아이들마다 자기 요구 사항을 늘어놓는다. 들어 줄 이야기도 많고, 고민하고 결정해 줄 것도 많다. 나도 집을 치운 다음, 직장에서 못다 한 업무를 마무리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정신없이 직장일과 살림을 하다 보면 때로 지치고 힘들 때도 있다.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를 지내다 보면 오늘 하루 예수님이 어떻게 나와 함께 하셨는지가 잘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나 혼자 덩그러니 달린 것 같다. 바쁜 게 줄어들고 고민거리가 적어지면 좀 나아질까하는 괜한 생각도 든다. 세상 속에서 평신도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게 가능한 것일까, 하느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고향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에 관한 구절을 묵상하게 되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4-57)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예수님이 자란 환경을 잘 아는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일 뿐,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보여 줄 그런 위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나아가 그렇게 비루하고 초라한 곳에는 하느님이 절대 오시지 않을 거라고, 뭔가 고귀하고 성스러운 환경에 오실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가난한 부모 밑에서 목수 일을 하고 형제들과 부대끼며 자랐던 예수님에게서 하느님 말씀과 지혜,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 오신 것일까. 어느 순간 아무도 모르게 근사한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나셨다면 사람들이 편견 없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분 말씀에 더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궁금함이 올라왔다.

잠시 머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특별할 것 없는 삶 속으로 다가오셨음이 느껴졌다. 성스럽고 경건한 환경이나 고귀하고 품격 있는 일을 통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지극히 세속적이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인간의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 가난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는 삶, 형제간 아옹다옹 부대끼며 사는 삶, 세상 풍파에 부딪치고 고뇌하는 인간의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

그것은 그런 인간의 삶 속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깊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그러신 것 같다. 인간의 삶을 관심 있게 지켜보시고, 귀기울이시고, 깊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러신 것 같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통해 그분의 지혜를 얻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흘러가자 지금의 내 삶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다. 평신도로서 성실하게 노동하고 가족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삶은 공생활 직전까지 예수님이 사셨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세속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드리며, 그분의 지혜와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이 다가왔다.

세속의 삶을 살면서도 거룩해질 수 있음을 보여 주신 예수님. 어쩌면 세속의 삶은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이자 초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로 주신 세상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런 세상을 돌보고 책임지도록 초대받은 평신도의 삶. 새삼 그 초대가 거룩하고 감사하게 다가왔다. 앞으로 그 초대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