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두산 경영 연구원 박용만(실바노) 회장

정리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21-08-31 수정일 2021-09-01 발행일 2021-09-05 제 3260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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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경영은 신앙과 맞닿아… 규범 바로 서야 보상도 공정”
■ ‘옆집 회장님’ 이미지
타인 의식하고 포장하기 싫어 내가 나다울 때 가장 편안해
최근 발표한 에세이집에도 친구와 나누는 편한 대화 담아
■ 어떤 ‘리더’ 필요한가
결정에 큰 영향 끼치는 만큼 권한에 따른 엄정한 평가 필요
구성원과 맺은 약속 지키고 공헌한 만큼 보상할 수 있어야
■ 봉사하는 회장님
부모 잃은 아이들 희망 주고 최근엔 후원 부족한 곳 찾아가
음식 만들어 드리고 대화 나눠 절망 빠진 젊은이들 돕고 싶어

“회장님?” 뒷모습을 먼저 봤다면 못 알아볼 뻔했다. 그의 소탈한 모습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쪽으로 시크하게 툭 걸친 손때 묻은 검정 백팩, 거기에 함박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며 신문사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모습…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을 지낸 기업가라고 하기엔 너무 친근한 모습 아닌가 하는 선입견이 발동했다.

이번 호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들’에서 박용만(실바노·66) 두산 경영 연구원 회장은 외적 소탈함과 유쾌함 이상으로 기업가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긍정적인 가치관과 올곧은 의식, 지혜로운 안목과 뚝심을 보여줬다.

“제가 신앙을 기준으로 경영을 했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입니다. 하지만 경영을 하면서 올바른 기업 경영 방식과 신앙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았죠.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는 말씀을 평소 많이 생각합니다. 최근 봉사 횟수가 많이 늘었는데, 성당에 자주 못가는 죄책감을 이걸로 좀 씻고 있다고나 할까요…. 하하!!”

박용만 회장은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며, 특히 젊은이들을 돕는 일에 투신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진 박원희 기자

대담: 장병일 편집국장

일시: 2021년 8월 25일

장소: 가톨릭신문사 서울본사

-장병일 편집국장(이하 장 국장) : 코로나19로 SNS가 더욱 활성화됐습니다. 특히 페이스북에서 회장님은 솔직하게 또 이른바 ‘옆집 회장님’처럼 친근하게 소통하시는데요. 그 진솔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솔직함에 대해 “SNS도 책도 솔직하지 않으면 쓸 이유가 없다. 내 생각을 밝히라는 강요도, 내 생활을 보이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죠. 여기에 회장님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용만 두산 경영 연구원 회장(이하 박 회장) :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편이고 어떤 관습에 얽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다울 때 제일 편안해지거든요. 자꾸 포장을 하기 시작하면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남의 눈에 맞춰 그 포장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는 부담이 생깁니다. 그래도 어른이니까 보통 사회에서 말하는 규범의 범위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되, 포장하지 않고 나답게 사는 게 가장 옳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 국장 : 최근 펴낸 에세이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에서도 일관적으로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큰 호응을 받고 있는 이 책을 발간하신 동기가 궁금합니다.

▲박 회장 :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술도 한잔해가면서 대화 나누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그냥 글로 한번 옮겨보면 어떨까 했어요. 소수의 친구들한테만 하던 이야기가 책을 통해 더 많은 분들께 전달되면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공통적인 평가가 “재미있다. 예상과 다르게”(웃음)였고요 “술술 읽힌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원래 의도가 그거였거든요.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친구의 이야기’ 같은 책을 쓰고 싶었어요.

-장 국장 : 올바른 ‘리더’에 관한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저서에서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가면, 그 직책에 걸맞은 사람이 될 때까지 저지르는 시행착오를 조직의 구성원들은 무수하게 겪어내야만 한다. 또 그 자리에 가기 위해 준비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준비 안 된 사람 때문에 낙오한 것인지도 돌아봐야 한다”고 하신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회장님께선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떤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 회장 : 소위 말해 삼각형 피라미드형에서 맨 아래 있는 구성원들은 자기 일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해 여러 사람과 같이 일하도록 이끄는 사람이라는 의미죠.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하는 일, 그 사람이 내리는 결정, 그 사람의 언행은 여러 사람한테 영향을 줍니다.

리더로 올라갈수록 권한과 책임이 커지기 때문에 그에 맞는 엄정한 평가가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문제점 중 하나가 리더로 올라갈수록 평가를 안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서만 비난을 하시죠. 저 사람은 왜 저 자리에 갔는지 의문도 가지시고요.

리더가 평가를 받고 그 평가를 통해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더 분명히 해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엄정한 평가가 있으면 그 자리에 앉지 않아야 될 사람들은 앉지 못하게 되기 시작할 테니까요. 하지만 평가 없이 비난만 하면 발전적 변화가 없습니다.

-장 국장 : 회장님께서 사랑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의 스승이라며 그들 곁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나 가진 자들의 도덕적 해이 등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업가=사장=부자’라는 공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박 회장 : ‘기업가=부자’라는 등식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기업가는 한 기업의 성과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책임이 크거든요. 그 책임만큼 보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 없고요.

선진국으로 갈수록 법 이전에 규범이 바로 서야 될 것 같습니다. 규범이 존재하지 않으면 법의 테두리에 가깝게만 살게 되거든요. 규범에는 어긋나도 합법인 경우, 사회적으로 처벌은 받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법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법을 어기게 되거든요. 그래서 규범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버스 정류장에서 줄 서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줄 서는 문화가 없었거든요. 버스가 오면 그냥 벌떼처럼 몰려들었어요.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줄 서는 게 쉽지 않습니까. 규범을 지키는 거죠.

그 다음으로는 탐욕에 대한 절제인데요, 건강하지 않은 욕심은 반드시 건강하지 않은 수단을 불러옵니다. 건강하지 않은 수단이 경영에 들어가면 그건 결국 일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이 어느 정도 수준인가에 대한 생각을 자꾸 해야 될 것 같아요.

-장 국장 : 그렇다면 경제인들, 특히 신자 경제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박 회장 : 구성원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어야 됩니다. 고용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없었고 사회가 굉장히 가난했던 시절에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이 베푸는 그런 개념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약속에 의한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기업의 리더인 제가 구성원에 대해 ‘내가 당신들한테 일자리를 주고 당신들의 일자리는 내게 달려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착각이죠. 오히려 반대죠. 시각의 변화가 좀 필요합니다.

기업가는 직원들하고 맺은 약속으로 경영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에 따라 그분들은 공헌을 하고 또 공헌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고 시너지가 나오며 기업에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신자들은 도덕적 규범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 경제인들은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죠. 제 경험에 의하면 하느님 말씀이 경영에 방해된 적이 없거든요.

-장 국장 : 회장님께서 이렇게 많은 봉사를 하고 계시고 또 기부도 많이 하시잖아요. 요즘은 몰타기사단 한국지부 회원들과 자원봉사를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영상을 통해 보니 주방에서 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요. 봉사를 시작한 계기와 회장님의 삶에서 봉사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박 회장 : 처음엔 부모 잃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봉사를 다녔어요.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니까 이 아이들을 돕는 게 더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사회사목하는 신부님께 조언을 구해 서울역 인근 쪽방촌에서 봉사를 했어요. 알코올 중독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처음에 든 생각은 그분들은 자신들이 그 삶을 선택했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상관없이 그늘에 있기에 아이들을 돕는 게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쪽방촌을 서너 번 방문했을 때인가, 이 생각이 굉장히 교만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모두 하느님 자식인데, 어떤 자식을 바라볼 때 하느님이 가장 아프실까 생각을 해보니, 희망을 찾지 못하고 옆에서 돕는 이들도 많지 않은 알코올 중독자들을 도와야 하겠더라고요.

요즘에는 후원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동네에 주방을 만들어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곳 쪽방에 계시는 분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갖다 드리면서 이분들의 삶을 자세히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주거 문제, 지원 문제 등에 대한 대화도 하게 되고요.

-장 국장 : 앞으로도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까요?

▲박 회장 : 가난한 분들이 계신 곳에서 일을 하고 싶고요. 또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한 젊은이들을 돕는 일도 좀 많이 하고 싶습니다. 66세면 이제 여행도 많이 다니며 좋아하는 거 하라고 말해주는 이들도 있긴 한데요, 팔자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웃음) 저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꾸 앞으로 뭐 할 거냐는 질문을 하네요.

-장 국장 :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가톨릭신문 독자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 회장 : 저도 처음에는 일상이 불편하고 답답하고 그래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 왜 이렇게 불편하고 많은 이들이 고통받아야 할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안에서도 할 일이 있고 생각할 거리가 있더라고요.

사람을 잘 만나지 못해도, 한 2년 만에 전화해서 얘기하면 만나지 못해도 전화라도 하니까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또 원래 책도 보고 신문도 보지만,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들으면서 세상일을 알잖아요. 그런데 사람을 잘 못 만나니까, 이럴 때 가톨릭신문을 보면 참 많이 도움 되죠. 신앙에 대한 지식도 얻고 교회 안팎에서 무슨 일 일어나는지도 알 수 있잖아요.

본지 장병일 편집국장(왼쪽)과 대담하고 있는 박용만 회장.

※박용만 회장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보스턴대학교 경영학 석사를 거쳐 한국외환은행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두산그룹에 입사해 식품, 출판, 광고, 건설, 중공업 등 여러 사업 부문을 거쳐 그룹 회장을 지냈다. 최근까지 두산 인프라코어 회장직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겸하는 등 국내외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온 기업가다. 현재는 두산 경영 연구원 회장을 맡고 있다.

대표적인 가톨릭 신자 기업가로서 국제적 구호 봉사단체 ‘몰타기사단’ 한국 지부를 이끌며,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프로급 칼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요리사로 봉사에 매진하고 있다.

정리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