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70) 들에 핀 나리꽃처럼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
입력일 2021-05-17 수정일 2021-05-18 발행일 2021-05-23 제 324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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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 피어나는 하느님의 아름다움

바삐 지낸 나의 근황을 알고 한번 와서 쉬어 가라는 친구의 간곡한 초대로 그의 전원주택을 찾아갔다. 친구의 정원에는 덩굴장미는 물론 웬만한 나무와 초화는 다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단풍나무, 소나무, 벚나무, 산딸나무, 불두화, 매발톱꽃, 튤립, 베고니아, 마가렛, 산수국, 붓꽃, 자운영 등등에다, 큰 항아리 뚜껑으로 만든 연못에는 올챙이까지 자라고 있었다. 자연 그대로인가 싶게 가꾸지 않은 듯하면서도 일일이 주인의 손길이 갔을 정원은 정말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낮은 울타리 너머 마주 보이는 숲에는 이제 제법 잎을 틔운 키 큰 나무들이 갖가지 녹색으로 봄바람을 읊고 있었다. 그렇게 자연을 그대로 불러들여 터를 넓힌 아름다운 정원과 친구의 사랑 가득한 접대 덕분에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나를 이층으로 안내하더니 액자를 하나 보여 주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시화 작품이 거기 있었다. 오래전 시화전에서 전시하고 선물한 것을 여태 간직하고 있었고, 그 액자가 해묵은 기억들을 불러냈다. 아마 족히 삼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아름다움이신 하느님께 푹 빠져 있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는 익히 들어 왔지만, 아름다움이시라는 말이 나를 매료했던 것이다. 들에 핀 나리꽃을 솔로몬보다 더 잘 차려입히는 분이시니, 당연한 말이다.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에 대해 알고 난 이후 나의 시작(詩作)도 방향을 제대로 잡게 되었으니, 사람들을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창작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 부드럽고 화려하거나 고운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끼아라 루빅은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으셨던 예수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은 없다고 하였다. 완전한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포콜라레 영성을 사는 이들은 집이나 옷 입는 방식으로도 사랑 안에서 조화로움을 표현하려 하며, 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는 우리 삶을 무지개색으로 정돈해 볼 때 파란색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조화로운 환경 및 예술적 차원을 말한다.

어느 분의 책 출판을 위해 출판사와 관계되는 업무를 대신 보아 드리게 되었다. 워낙 사진이 많이 들어가는 책이라, 시작부터 디자인실 직원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1차 교정을 하러 간 날, 웬일인지 그 직원의 태도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수인사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연배로나 고객이라는 입장에서도 그의 홀대는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서운함과 억울함 같은 것이 목까지 차올랐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 좀 세게 나갈 걸 그랬나, 잡다한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입장에 나를 세워 보게 되었다. 디자인도 창작인데 곳곳에 수정을 요구하는 빨간 색이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분명 고심해서 디자인을 했을 텐데 저자와 나의 요구는 디자이너와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젊은 그 디자이너의 마음이 되어 보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그가 출근할 때쯤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많이 힘들었겠다고, 젊은이답게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줬는데 저자는 차분하고 안정감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방향이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저자의 마음에 드시도록 돕는 게 우리 몫이 아니겠느냐고, 책은 분명히 잘 나올 것이라 믿는다고 하며.

오후 늦게 그에게서도 긴 문자가 왔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자신의 욕심이 과했던 탓인 것 같아서 부끄럽고 죄송하며, 당연히 원하시는 대로 수정해 드리겠노라고 하였다. 평화가 돌아왔다. 그 다음 교정 때는 상냥함이 넘쳤고, 우리는 세세한 부분까지 충분히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한 사람은 아름답다. 또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친구의 정원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과정까지 속속들이 아름다운 책을 저자와 독자들에게 건네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