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박종원·고순이 부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11-19 수정일 2019-11-19 발행일 2019-11-24 제 317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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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고문 함께 견디며 순교

함께 고문을 당하는 성 박종원·고순이 부부, 탁희성 작,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

한국순교성인·복자 중에는 부부나 가족이 함께 하느님을 믿다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많다. 제1대리구 비봉본당은 이런 부부 순교자 중 성 박종원(아우구스티노)·고순이(바르바라) 부부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박종원 성인은 서울에 살던 중인 계급의 신자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온화하고 친절한 성격에 학문에도 뛰어나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어려서 부친을 잃은 성인은 집안이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모친을 효심으로 봉양하며 교회의 계명을 충실히 지켰다.

박종원 성인과 혼인한 고순이 성인은 순교자의 딸이었다. 성인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부친 고광성을 본받아 수덕생활에 열심했다고 한다.

부부는 혼인한 이후 자녀 셋을 낳아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돌보는 한편 교회를 위해 열성적인 활동을 펼쳤다. 남편 박종원 성인은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부부는 합심해 냉담신자를 권면하고, 교리를 가르쳤다. 또 가난한 이들을 돕고 병자들을 간호하는 사회복음화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회장인 박종원 성인의 온화함은 신자들 사이에도 유명했는데, 신자들은 “대관절 아우구스티노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인은 악습이나 큰 잘못을 저지른 신자라도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지극한 정성에 성인의 권고를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고 한다.

성인은 평소에도 종종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곤 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성인은 밤마다 위험을 무릎 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 결국 10월 26일 부부는 차례로 체포됐다.

박종원 성인이 체포된 이후, 남편을 따라 자수하려고 마음먹었던 고순이 성인에게도 포졸이 들이닥쳤다. 당시 그녀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을꼬? 나는 천주를 위하여 치명함으로써 그분께 사과하련다”고 말했다고 한다.

부부는 포청에서 서로 만나게 해 준 은혜에 감사하며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했다. 포장은 부부를 함께 불러내 배교를 강요했지만, 부부는 흔들림이 없었다. 부부는 여섯 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똑같이 받아냈는데, 박종원 성인은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고, 고순이 성인은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마침내 고순이 성인은 그해 12월 29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42세의 나이로, 박종원 성인은 183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