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길에서 쓰는 교구사]어농성지(상)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8-09-11 수정일 2018-09-11 발행일 2018-09-16 제 3112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복자 윤유일 후손이 선산 공개·기탁
순교자 의묘 조성하고 성지로 선포

어농성지 전경.

순교자 성월이다. 순교자들의 삶과 순교 터전인 교구는 설정 초기부터 순교자 현양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왔다. 103위 성인 현양도 마찬가지지만, 시복 시성되지 않은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현양하는 일에도 앞장서왔다. 특히 124위 복자로 시복된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들을 현양해온 성지가 있다. 바로 어농성지다.

어농성지를 찾으니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어농성지 부지도 성지조성 전에는 대부분이 이런 농경지였다. 성지입구에서 곧바로 순교자묘역을 향했다.

야외제대를 둘러싸듯 펼쳐진 산비탈에 묘지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묘비명을 하나씩 하나씩 읽어나갔다 복자 윤유일(바오로)·최인길(마티아)·지황(사바)·주문모(야고보)·윤유오(야고보)·윤운혜(루치아)·정광수(바르나바)·윤점혜(아가타)·강완숙(골룸바)…. 성지에서 현양하고 있는 17위의 순교자들의 묘가 있었다. 최초의 교회 밀사인 윤유일 바오로와 그 동료 및 가족들은 초창기 한국천주교회가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목숨까지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었다. 물론 이중 대부분은 실제로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있지는 않은 의묘다.

어농성지의 성역화가 진행된 것은 1987년 윤유일 복자의 후손이 나타나면서다. 후손들은 이천 모가면 어농리에 순교자인 윤유오의 묘와 윤유일의 조부와 부친 등의 묘가 있는 파평 윤씨 일가의 선산이 있음을 밝히고 교구에 선산을 제공했다.

교구는 이 선산을 성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순교 후 시신을 찾지 못한 윤유일, 윤관수, 윤점혜, 윤운혜 등의 의묘를 만들고 1987년 9월 15일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남수 주교가 축복하고 성지로 선포했다.

교구는 이듬해 3월 이천성지 개발위원회를 발족했다. 이천본당 주임신부가 위원장을 맡은 이 위원회는 이천지역의 성지, 단내와 어농리를 성지로 개발할 수 있도록 추진했다. 이어 같은 해 6월 28일에는 김남수 주교와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 주교가 집전한 ‘순교자 윤유일·정은 현양대회’가 거행됐다. 또 어농성지에서 ‘주문모 신부 동상 기공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교구는 1998년 이천성지 전담신부를 발령해 성지 개발과 순교자 현양에 박차를 가했다. 2002년에는 성지 성당과 사제관을 봉헌했는데 이때 당시 교구장이었던 최덕기 주교는 성지는 ‘을묘(1795)·신유박해(1801)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지로 선포했다. 이어 2003년 1월 28일자로 기존에 이천성지 전담이 어농성지와 단내성가정성지를 모두 관할하던 것에서 각각 전담사제를 파견해 성지개발을 하게 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