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붓어머니 강완숙의 신앙을 모범 삼아 교회에 헌신 주문모 신부의 복사 맡아 어머니 순교 후 사형 당해
복자는 주문모 신부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집을 옮겨 다녔다. 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황사영(알렉산데르) 등의 교회 지도층과 교류하고 신앙을 키워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복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박해자들이 복자의 집에 들이닥쳤다.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쫓던 박해자들은 신부의 거처를 알기 위해 혈안이 돼 복자는 다른 이들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주문모 신부에 관해서도, 다른 신자들에 관해서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형벌을 이겨내긴 했지만 복자의 마음은 결국 약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마침 조사를 받으러 가던 어머니 강완숙의 말을 듣고 복자는 다시 마음을 돌렸다. 강완숙이 복자를 보고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라고 말하자, 복자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박해자들을 향해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했다. 복자는 어머니가 순교하고도 3개월가량을 옥중에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로는 마음이 약해지지도 신앙고백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복자는 사형을 앞두고 최후 진술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1801년 10월 4일 서소문 밖에서 복자는 2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