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원경도(요한)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7-10-17 수정일 2017-10-17 발행일 2017-10-22 제 306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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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박해의 상처, 옥중 치유 기적 일어나
사촌 도움으로 배교 유혹 물리쳐
장인인 복자 최창주와 같은 날 순교

복자 원경도(요한) 초상화.

1800년 예수부활대축일. 복자 원경도(요한, 1774~1801)는 사촌인 복자 이중배(마르티노) 등과 함께 여주 양섬에서 순교자 정종호가 마련한 축하 행사에 참가했다. 이들은 예수 부활을 축하하며 희락경(喜樂經, 부활삼종기도의 옛 말)을 바치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춰 성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다. 하지만 외교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포졸들은 곧바로 복자와 함께 있던 신자들을 관아로 끌고 갔다.

끌려가는 도중 복자의 집 앞을 지나게 됐다. 복자의 노모는 포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지만 포졸들은 냉정히 거절했다. 여주 관장 또한 이들이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형벌부터 가했다.

당시 복자는 일행들을 대표해 관장에게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돼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며, 더욱이 천주를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복자는 1797년 복자 이중배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평소 곧은 성격과 절제의 태도를 갖춘 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있어서도 늘 확고부동한 모습을 보였다.

옥중 생활은 6개월 넘게 이어졌다. 형벌은 수시로 가해졌다. 때문에 복자는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상처를 수도 없이 입었지만, 그 상처들은 기적적으로 말끔히 낫곤 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엔 집안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찾아와 어머니와 부인이 매우 슬퍼하고 있다고 간청하자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중배의 도움으로 배교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해 10월이 되자 복자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됐다. 이어 1801년 신유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더욱 혹독한 형벌이 이어졌다. 최후에 가해진 것은 사형선고. 경기 감사는 당시 사형문에서 복자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교회의 지시대로 형에게 제사를 폐지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를 모두 끊어 버린 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경기도 여주는 인근 양근(현 양평), 광주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된 지역이다. 특히 여주는 조선에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헌신한 복자 윤유일(바오로)의 집안이 자리 잡고 있던 고을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지역 복음화의 구심점이 됐던 집안은 바로 복자 최창주(마르첼리노)의 집안이었다. 그는 모든 가족을 입교시키고 두 딸도 신자에게 출가시켰다. 복자 원경도는 바로 복자 최창주의 둘째 사위였다.

복자가 갇혀있던 옥에 복자 최창주도 끌려 들어왔다. 어머니와 부인의 강요로 피신 길에 나섰던 그는 회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곧바로 체포됐다. 힘든 옥중 생활 중에도 이들 장인과 사위는 서로를 격려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온갖 심문과 고문을 이겨나갔다.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간수 중 한 명은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복자는 1801년 4월 25일 여주 관아 남문 밖에서 장인과 같은 날에 순교했다. 그의 나이 만27세였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여주성당

여주성당 전경.

‘여주 출신 9위 순교 복자’ 현양의 구심점은 바로 용인대리구 여주성당(경기도 여주시 우암로 5)이다.

여주본당은 성당 옆에 성모동산을 조성하고 순교자현양비도 세웠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원경도와 이중배 등 여주 출신 순교자 17위의 이름이 새겨진 순교자현양비다. 또한 본당은 여주시 하동 양섬과 복자의 순교터로 추정되는 여주시 중앙동 비각거리에도 현양비를 세워 순교의 의미를 새기고, 순교 신심을 이어가고 있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