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최인길(마티아)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7-09-26 수정일 2017-09-27 발행일 2017-10-01 제 3064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주문모 신부 입국 후 함께 살며 조선말 가르쳐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에 능통
주 신부 피신 위해 신부로 위장한 채 잡혀

복자 최인길(마티아) 초상화.

한양 계동, 한 역관의 집 앞뜰에서 중국옷을 입은 사람이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포졸들은 무지막지하게 들이닥쳤다. 중국어를 하는 모양새를 보고 포졸들은 그를 중국인 신부로 알았지만, 곧바로 사실이 들통 났다. 그는 주문모 신부로 위장하고 있던 최인길(마티아·1765~1795) 복자였다.

주 신부가 조선 땅에 들어온 경위가 밝혀지고, 이어 복자와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펼친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도 체포됐다. 이들 셋은 박해자들이 아무리 혹독한 형벌을 가해도 주 신부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 복자는 손바닥을 제외하고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처를 입었지만,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기쁨의 미소까지 지었다. 더는 배교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박해자들은 이들을 사정없이 때려 죽게 했다. 1795년의 일이었다.

초기 교회 시절, 우리 신앙선조들은 조선에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상인 등으로 위장, 중국 북경을 오가며 서한을 전하는 등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실패와 박해가 연이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794년 말, 마침내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사제가 들어왔다.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였다.

복자는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보다 쉽게 접하고 받아들이는 역관 집안이어서, 천주교를 접하는 데에도 빨랐다.

복자는 이벽(요한 세례자)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한국교회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됐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인 마리 니콜라스 앙투안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이벽과 만난 복자에 관해 “중인 계층이긴 했으나 학문으로나 품행으로나 모두 출중했다”고 설명했다.

복자는 한국교회 성직자 영입 운동에 힘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윤유일이 사신 일행으로서 베이징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선교사들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 영입 운동이 전개되자, 복자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는 동생 최인철(이냐시오)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이후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서울로 들어오자, 복자는 한양 계동 자신의 집에 주 신부를 모시고 조선말을 가르쳤다. 게다가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가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대신 신부로 위장했다. 역관 집안에서 성장해 중국어를 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1797년 당시 베이징교구장 알렉산델 드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서 보낸 밀사를 통해 주문모 신부가 살아있다는 사실과 복자와 그 동료들이 용감하게 순교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구베아 주교는 중국 쓰촨성에서 사목하던 장 디디에 드 생 마르텡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복자가 보여준 용기와 활동에 대해 알렸다. 이 서한은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대해 쓴 16통의 서한 가운데 하나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없습니다.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구베아 주교는 복자가 포청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어농성지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 62번길 148)는 최인길(마티아) 복자를 비롯해 강완숙(골룸바) 복녀 등 17위의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현양하는 구심점이다. 성지 내에는 순교자들의 의묘도 자리하고 있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