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교구 이곳저곳] (17) 손골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1-03 수정일 2017-01-03 발행일 2017-01-08 제 302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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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깊은 신자들과 선교사들이 살던 ‘향기로운 골짜기’
서울과 가깝지만 인적 드문 곳
선교사 적응 돕는 곳으로 활용
지역 선교 요충지 역할 수행해

손골성지 성당 전경

광교산 기슭, 용인 방면에서 작은 계곡을 따라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붉은 벽돌의 성당 위에 세워진 십자가가 보인다. 그리고 아담한 공간이 펼쳐진다. 바로 손골 교우촌이 있던 자리, 손골 성지다.

광교산을 배경으로 계곡 물가를 따라 상록수들과 꽃나무들, 잔디가 어우러진 손골성지는 꽃과 녹음이 우거진 시기도 아니었지만, 마치 아늑한 정원 같은 인상을 준다. 손골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느낌이다. 손골은 원래 향기로운 풀과 난초가 무성해 손곡(蓀谷), 즉 ‘향기로운 골짜기’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성지를 오르는 길목에는 많은 단독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도시개발이 되지 않아 경관도, 공기도 좋은 산골짜기일 뿐 아니라 서울과 가까운 곳이기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손골에 신자들이 모인 이유도 비슷했다. 박해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경상도, 전라도 등 서울에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다소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이 가까운 지역에 자리 잡기도 했다. 신자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서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산골짜기를 찾아 들었다.

특히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울 근교에 많은 교우촌이 형성됐다. 선교사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사목을 시작하자 미사와 성사에 참례하기 위해 신자들이 모여든 것이다.

성지를 둘러보니 성지에서 현양하는 성인들의 동상이 눈에 띄었다. 잘 보이게 세운 것도 눈길을 끈 이유였지만, 두 성인 모두 서양인이라는 점이 더욱 눈길을 사로잡았다. 두 성인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신부였다. 두 성인 모두 손골을 거점으로 사목하다 순교했다.

손골은 선교사들이 언어와 풍습을 익히면서 선교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곳이었다. 박해가 극심한 시기였던 만큼 선교사들이 활동에 앞서 안전하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곳이 바로 손골이었다. 손골은 선교사들이 보기에, 교우촌 중에서도 신심이 깊은 이들로 형성된 믿을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해시기 교구 지역을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4년 당시 조선대목구장이던 베르뇌 주교는 오메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4곳’을 사목하라고 인사발령을 냈다. 오메트르 신부는 손골을 거점 삼아 미리내, 무량골, 소내실 등 경기지역의 주요 교우촌들을 다니며 사목했다.

손골은 경기 지역 사목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사목활동을 쉬는 여름철에는 손골을 찾아 피정을 하는 등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했다.

손골에 선교사들의 숨결이 이토록 남아있기에 손골의 성지 개발은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도리 성인의 고향인 딸몽본당 주임으로 재임했던 죠셉 그럴레 신부(Joseph Grelet)는 1960년대 여러 차례 손골을 찾았고, 손골에 순교자현양비를 세웠다. 도리 성인의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로 똑같이 생긴 2개의 십자가를 만들어 하나는 성인의 고향인 프랑스 딸몽에, 하나는 성인의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손골에 세워 성인을 현양했던 것이다. 이 현양비 건립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닿으면서 손골이 성지로 개발되는 계기가 됐다. 현양비는 지금도 성지 예수성심상 곁에 세워져 프랑스와 한국을 이어주고 있었다.

성당을 찾으니 손골에서 생활하던 순교자들의 생활이 성당 유리화에 담겨있었다.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한 손골이었지만,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난 병인박해의 칼날은 피해가지 못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도리 성인은 손골의 신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홀로 손골에 남아있다 체포됐다.

손골의 신자들은 도리 성인의 명으로 손골을 떠났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 많은 수가 순교했다. 성당 뒤편에 안장된 무명 순교자들도 손골의 신자들이었다. 성지 성당에는 미사가 없는 시간이었음에도 많은 신자들이 남아 기도하고 있었다. 비록 선교사들도, 순교자들의 이름조차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이 지켜낸 신앙은 여전히 향기로운 골짜기 손골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손골 지역에서 사목하다 순교한 성 오메트르 신부 동상

손골성지 성당 내부. 미사가 없는 시간이지만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