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본당의 역사를 따라] 성남대리구 퇴촌본당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6-11-08 수정일 2016-11-09 발행일 2016-11-13 제 301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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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발상지’에 자리잡고 공소 중심 전교활동 펼쳐
2006년 퇴촌면 도수리로 옮겨와
‘장 담그기’로 성당 건축기금 마련
지역 특색 살려 공소사목 특화

퇴촌성당 전경.

천진암에서 강학을 열고 신앙공동체를 이루던 신앙선조들의 뜻을 기리며 설립된 본당이 있다. 바로 성남대리구 퇴촌본당(주임 임익수 신부)이다.

오늘날 성지로 조성된 천진암은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등의 신앙선조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자발적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던 장소다.

1968년 병인박해 때 장단(長湍)에서 잡혀 순교한 손성직(베드로)의 가족이 광주 소뫼(牛山里, 지금의 퇴촌면 일대)에서 이주한 사람이라는 기록 등을 볼 때 박해시기까지도 천진암 인근에는 신자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박해 이후 천진암 인근 지역에는 신자들이 살지 않았고, 1970년대 말까지도 신자가 없었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한 곳이었지만, 신앙의 불모지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퇴촌 지역에 교회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였다. 당시 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이던 변기영 몬시뇰이 이 지역을 담당하던 신장본당 주임 신부의 안내를 받아 천진암과 퇴촌 지역을 탐방했다. 이어 1976년 신장본당에 부임한 변 몬시뇰은 퇴촌 지역에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다. 신자가 없는 지역임에도 매주 주일학교 교사를 파견하고 봄·가을 판공마다 순회했다. 또 선교사를 상주시켜 전교한 결과 퇴촌 지역에 다시금 신앙공동체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교구는 1984년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사업을 종료하면서 천진암성지 전담을 임명, 성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이듬해인 1985년 2월 5일 지금의 퇴촌본당인 ‘천진암본당’을 설립했다. 본당으로 설립되기는 했지만 신자 수는 어린이를 포함해 73명에 불과했다.

본당공동체는 설립 후 10년여 간 임시성당과 조립식성당을 전전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광주군 퇴촌면, 여주군 산북면, 광주군 남종면에 위치한 공소를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해 1992년에는 300여 명으로 신자가 증가했다. 본당은 1994년 지금의 천진암성지에 있는 광암성당을 준공하고, 1995년에는 양평본당에서 왕창리, 운심리, 향금리, 동오리 지역의 관할을 이관 받았다.

2011년 3월 6일 당시 주임 김대우 신부와 함께 메주를 닦는 퇴촌본당 신자들.

본당 설립부터 20여 년을 천진암성지를 터전으로 삼고 신앙활동과 복음 전파에 노력해오던 본당은 2006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성지와 본당을 분리하고, 명칭도 퇴촌본당으로 변경한 것이다. 성당도 천진암의 광암성당을 떠나 퇴촌면 도수리의 상가건물을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다.

본당은 시골본당의 특색을 살린 사목을 펼쳐나갔다. 본당은 ‘장사랑회’를 만들고 장 담그기를 통해 새 성당 마련과 본당공동체의 친교를 함께 도모했다. 좋은 콩을 사서 메주를 쑤고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본당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고 성당 건축기금도 마련했다. 또한 공소사목을 특화시킨 점도 눈길을 끈다. 본당은 2008년 강하공소의 새 성당을 봉헌하면서, 외부 신자들이 피정의 집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2010년 봉헌한 산북공소는 전임교구장 최덕기 주교가 머물며 사목하다 2016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현재도 본당은 2개의 공소를 관할하면서 각 공소가 본당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목을 전개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