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공소의 재발견] (8) 곡수공소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5-01-13 수정일 2015-01-13 발행일 2015-01-18 제 292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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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열정으로 신자 없는 마을에 생겨난 공소
초창기엔 사제 만나려 20km 길 걸어
운영 기금 마련 위해 잣나무 숲 조성
인구 감소·고령화로 신자수 줄었지만
3년 전부터 인근 부대 병사들로 활기
인근 부대에서 미사 참례 온 병사들과 자리를 함께한 곡수공소 신자들.
신자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공소가 된 곳도 있지만, 선교로 피어난 공소도 있다. 신자들이 아무도 없던 마을에 뿌리내린 공소, 용인대리구 양평본당(주임 이재열 신부)의 곡수공소를 찾았다.

곡수공소는

곡수리는 신자가 없는 마을이었다. 1949년 곡수리에 정착한 김영수(요셉)씨의 선교로 1955년 김복수(요셉·곡수공소 초대회장)씨가 세례를 받으면서 공동체가 생겨났다. 1960년대부터 꾸준히 영세자가 늘면서 1966년에는 신자수가 20여 명이 돼 공소로 인준 받았다.

여건은 열악했지만, 선교를 향한 열정은 뜨거웠다. 사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관할본당인 양평본당을 찾아야 했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았고 버스도 거의 없었다. 산을 돌아가면 20km 가까운 길을 가야했다. 일 년 중 사제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봄과 가을, 두 번의 판공 때뿐이었다. 공소건물도 없어 공소회장 집에서 공소예절을 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세례 받는 이가 꾸준히 있어 1970년대에 들어서자 신자가 40명이 넘었고 1980년에 들어서면서는 70여 명으로 늘었다. 1982년 곡수보건소 소장으로 성가소비녀회 수녀가 파견되자 수녀들과도 교류하면서 예비신자교리가 활성화 돼 단 3년 동안 82명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신자들은 공소의 크고 작은 일에 힘을 모았다. 1981년 첫 공소건물은 신자들의 땀으로 만든 공소였다. 공소회장이 구입한 산을 곡괭이와 삽으로 깎고 사제관의 헌 자재를 가져와 신자들이 직접 공소를 지었다.

공소 뒤편 산에 우거진 잣나무 숲도 공소 신자들이 공소운영 기금 마련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비록 관리할 사람이 없어 잣 수확은 어렵게 됐지만, 1983년부터 자그마치 7년 동안 제초작업을 하며 공소의 모든 신자들이 노력해 가꾼 숲이다.

지금은 인근에 진출한 개신교회의 신자가 더 많지만, 그동안 왕성했던 공소의 선교로 아직도 곡수리마을 220세대 중 40세대 이상이 신자들의 집이다.

공소 3·6대 회장을 역임한 한기수(요한·65)씨는 “곡수공소 신자들은 교리지식은 많지 않아도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공소 일에 힘을 모았다”면서 당시 공소 분위기를 설명했다.

또 다른 선교의 터전으로

1999년 공소건물을 신축했지만, 신자 수는 감소해갔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마을 인구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공소 미사에 60여 명이 참례했지만, 지금은 그 반가량으로 줄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고령자로 미사 참례를 할 뿐, 활동할 수 있는 신자들도 많지 않았다. 공소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공소 교육관을 피정의 집으로 활용해보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관리할 사람이 없어 운영이 중단됐다.

이런 공소가 다시 활기를 띤 것은 3년 전부터다. 매주 오전 8시30분 봉헌되는 공소 미사에는 인근 부대 4곳에서 온 병사 80여 명의 목소리로 활기가 넘친다. 군종교구 결전본당(주임 손해락 신부) 소속 병사들은 매주일 공소 미사에 참례할 뿐 아니라 독서와 반주도 도맡아한다. 미사도 양평본당 주임신부와 결전본당 주임신부가 번갈아 주례하며 신자들과 병사들의 성사생활을 돌보고 있다. 공소신자들은 병사들을 위해 매주 간식을 준비하고 군종병들이 교육관을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매주일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는 김지현(요한·22)씨는 “공소 신자분들이 친절하고 많이 도와주셔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매주 미사를 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곡수공소 외부 모습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