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자의 땅] (6) 죽산성지

김진영 기자
입력일 2014-05-13 수정일 2014-05-13 발행일 2014-05-18 제 289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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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써 증거한 신앙 …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같은 장소서 한 가족 처형 금지 불구
국법 어기면서 신자 처형 자행돼
순교비·역사비 세워 당시 신앙 기억
두둘기바위·묵주길 등으로 체험장 마련
죽산성지 순교자 묘역 앞 마당에는 대리석으로 된 묵주알들이 있어 묵주가 없더라도 묵주기도를 할 수 있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종배길 115(죽림리 703-6)에 위치한 죽산성지(전담 이철수 신부)는 잘 꾸며진 성지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비통함이 서려있는 장소다. 병인박해 시기 22명의 신자들이 죽산 관아로 끌려와 혹독한 형벌과 심문을 받았고, 형장에서 교수형과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조선의 국법상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한 가족이 처형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자행됐다. 얼마나 철저하게 천주교를 탄압하였는지 신자들의 처형이 있은 후 1932년까지 단 1명의 교우도 없었다고 알려진다.

■ 순교성인들의 아픔과 슬픔

일죽IC에서 나와 우회전 후 400m 가량 이동하면 죽산성지입구삼거리가 나온다. 커다란 표지석이 입구를 알려주고 있지만 초행길인 신자들은 종종 놓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표지석 앞에는 날개를 활짝 핀 새 형상의 나무가 있는데, 이는 하늘나라를 향해 훨훨 날아가고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을 상징한다. 표지석 주변에는 고고하게 서있는 학의 모습을 띈 나무들이 서 있는데 성지 내부에도 이와 같은 모습의 나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표지석 뒤에는 강성원(보니파시오)씨가 대지와 설치비를, 최정규(요셉)씨가 표지석을 봉헌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작은 비가 마련돼 있다.

‘두둘기바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표지석은 죽산 읍내에서 6km 떨어진 삼죽면에서 있는 ‘두둘기’라는 곳에서 왔다. 그 곳에는 주막이 있었는데 포졸들이 신자들을 잡아끌고 가다가 이 주막에 들려 술을 마신 뒤 심하게 두들겨 패서, 이 마을 이름이 ‘두둘기’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역개발로 인해 ‘두둘기’에서 옛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그 지역의 바위를 옮겨 성지의 표지석으로 삼으면서 당시 신앙선조들이 겪었던 고난과 아픔의 기억이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

표지석을 지나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교구 영성관과 순교체험장이 나온다. 예비신학생들의 연수와 피정 공간으로 활용되곤 하는 영성관은 교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장소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착각할만큼 잘 꾸며진 순교체험장에서는 어디서든 언덕 위에 두 팔 벌리고 있는 예수성심상을 볼 수 있다.

죽산으로 끌려온 신앙선조들은 진영 동헌 앞에서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했다. 옥에 수감돼 배교를 강요당하고,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치명일기」와 「병인 치명사적」, 「박순집 증언록」 등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자료들을 근거로 했을 때 병인박해 당시 죽산에서 확실히 순교한 신자는 18명이며, 죽산 포교에게 체포가 된 것은 분명하나 어디서 죽었는지 불분명한 신자들은 4명이다. 또한 죽산 포교에게 체포됐으나 인근 수원에서 순교한 사례도 발견된다.

순교자들이 겪었을 고난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본 후 언덕을 오르면 소성당과 만남의 방에 도착하게 된다. 소성당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성 범 앵베르 주교, 성 나 모방 신부, 성 정 샤스땅 신부의 유해가 보관돼 있으며, 조용히 묵상하기에 좋은 분위기와 여건이 마련돼 있다. 소성당 뒤에는 사무실이 있는데 이곳에서 성지순례도장을 찍을 수 있다.

■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주차장을 통해 성지에 들어갈 경우 만남의 장을 먼저 만나게 된다. 여기 저기 세워진 정자는 성지 주변을 둘러싼 전통담과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려 글짓기나 그림그리기를 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성역(聖域)이라 쓰인 성지 입구를 들어서면 한쪽에는 순교비가 다른 한쪽에는 역사비가 세워져있다. 그리고 제대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는 눈에 띄는 대리석으로 된 커다란 알이 보인다. 이 알들 하나하나가 바로 묵주알이다. 묵주가 없더라도 광장을 한 바퀴 돌면 자연스럽게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다.

제대 뒤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데 한 가운데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고, 양 끝에는 현양탑과 초봉헌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죽산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형됐는데, 1867년 처형된 여정문 일가와 1868년 조치경·김 우보로시나 부부와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 및 최성첨과 그의 장남이 그러한 예이다.

■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주소서

시복을 앞둔 하느님의 종 박 프란치스코는 원래 충청도 청주 사람이다. 그는 오 마르가리타와 혼인해 4형제를 두었는데,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들어가 살았다. 1868년 박해가 더욱 거세지면서 많은 신자들이 붙잡혔고, 그해 9월 5일 포졸들이 박 프란치스코가 사는 마을까지 왔다. 박 프란치스코는 산속으로 피신했으나, 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많은 매를 맞았다. 이후 피신했던 박 프란치스코 역시 포졸들에게 붙잡혀 부부가 함께 죽산도호부 관아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고, 한 달 동안 감옥 생활 후 죽산에서 함께 순교했다.

순교자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뒤로 한 채 동산에 오르면 십자가의 길이 펼쳐진다. 십자가의 길을 끝내고 바라본 죽산성지는 아름답지만, 이곳은 ‘잊은 터’라 불리던 장소다. 박해 시기에는 노송이 우거진 숲으로 삼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큰길가에 접해 있던 이곳에서 신자들을 죽임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자 했던 곳이다. 예전에는 ‘이진 터’라 불렸던 장소지만, 병인박해 당시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고 해 ‘잊은 터’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말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죽산성지 순교자묘역.
죽산성지 표지석 ‘두둘기바위’는 압송돼 가던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두들겨 맞던 두둘기고개에서 옮겨온 바위로 만들어졌다.
죽산성지 만남의 장에서 성역 입구로 들어가는 ‘성역문’ 뒤에는 순교비와 역사비가 세워져 있다.

김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