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자의 땅] (3) 수리산성지

이우현 기자
입력일 2014-04-01 수정일 2014-04-01 발행일 2014-04-06 제 288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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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성인 도와 신앙공동체 일군 ‘이성례’
사순시기 금육·금식으로 모은 양식 가난한 신자와 나누고
신앙 지키려 낯선 곳으로 이주 … 가난함·궁핍 기쁘게 감내
모성애 때문에 잠시 배교했으나 곧 뉘우치고 순교의 칼 받아
수리산성지 성당 내 최경환 성인·이성례 가족 그림.
경기도 안양,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수리산성지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물론,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이성례는 신앙생활을 더욱 잘 지켜나가려는 열망으로,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를 다니면서도 모든 어려움과 궁핍함을 기쁘게 감내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던 이야기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내심을 기르도록 이끌어줬다.

또한 이성례는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나가는 것은 물론, 집안의 화목을 이끌었다. 가난한 중에도 사순시기에는 금육과 금식으로 모은 양식을 남편과 의논해 가난한 신자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성인과 더불어 수리산에 정착한 이성례는 당시 교우촌 회장의 부인이자, 신학생의 어머니로서 남편을 도와 마을을 신앙공동체로 일구는데 힘을 보탰다. 성인이 한양을 오가며 박해와 기아로 죽은 이들을 수습하고, 교우들을 돌보며, 순교자들의 시체를 매장해주느라 분주한 가운데, 이성례도 그 뒷바라지를 하며, 남편의 뜻을 따랐다.

교우촌이 있던 수리산 뒷듬이 마을은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마을이었다. 땅이 척박했기에 각자 양지 바른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담배밭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가던 곳으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천주교인들이 담배를 경작하기 시작하면서 담배촌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성인과 이성례를 비롯한 신앙 선조들은 험난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갔지만,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는 지금은 오히려 교우촌이 자취를 감춰버린 상태다. 연구자들은 수리산 등산로 초입의 음식점 뒷길로 올라가는 산길 중턱에 햇빛이 잘 드는 곳이 교우촌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우촌으로 생각되는 자리는 그곳까지 이르는 길이 병목처럼 좁아 숨어 지내기 좋은데다, 산길을 통해 타 지역으로의 이동이 용이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교우촌의 후손인 김현상(프란치스코·82), 장옥순(골롬바·80) 부부는 “지금은 많이들 떠나고 없지만, 이곳에 교우들이 많이 살았었다”며 “신앙 선조들은 골짜기 밭마다 담배 농사를 지으며 식생활을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교우촌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장소이기는 하나, 현재 그곳은 시 소유 땅으로 자주 찾아가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 한양의 포졸들이 수리산에 들이닥치자 이성례는 손수 음식을 준비하고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자식들과 함께 남편의 뒤를 따라 한양으로 향했다. 당시 포졸 하나가 이성례에게 접근, 치근거리며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희롱하기도 했는데, 그는 포졸의 야비한 행동을 나무라고는 무리를 따랐다.

포도청에 압송된 이성례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돼 젖먹이 아들과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갇히게 됐다. 심문을 받으며 가해진 300여도의 메질에 온몸에 성한 구석이 없을 정도였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성애가 어머니 이성례의 마음을 잠시 약하게 만들었고, 남편이 고문 끝에 감옥에서 죽자 마음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맏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다시 체포되기에 이른다.

형조 감옥에서 용감한 신자들의 권고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이성례는 재판관 앞에서 당당히 배교를 취소했다. 그는 막내아들을 감옥에서 잃었지만, 막내아들과 함께 신학생으로서 맏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게 된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성례는 관례대로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옥으로 찾아오는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찾아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자신이 또 다시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성례는 자식들에게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고,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1840년 1월 31일 동료 순교자 6명과 함께 형장 당고개로 끌려 나간 이성례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한 칼에 목이 베인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아직까지 이성례의 시신은 찾지 못했으나, 성지는 성인과 함께 그의 삶과 신앙을 공경하며, 현양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성지 성당에는 교우촌과 성인, 이성례 가족의 그림이 걸려있다. 또한, 성지는 오는 5월 10일 제8회 산상음악회를 연다. 이번 음악회는 성인의 시성 30주년과 이성례의 시복을 기념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더불어, 성지는 앞으로 성지 소개 동영상과 이성례에 관한 30분짜리 영화를 만들어 성지와 시복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예정이다.

성지 성당에 있는 교우촌 그림.
수리산성지 교우촌 추정 지역.
성지 성당 앞 최경환 성인·이성례 비석.
성지 성당 앞 최경환 성인상.

이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