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성찬경의 반투명 인생노트 (39) 기적과 풀이

성찬경(시인·예술원 회원)
입력일 2012-02-07 수정일 2012-02-07 발행일 2012-02-12 제 278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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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 믿기 위해서는 ‘어린이’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 중에서 기적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흔한 말로 향기 없는 꽃이다. 마음으로라도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기적을 ‘기적’이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부터 우리는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기적이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는 행적(행동과 결과)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의 행적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갈 수 있게 설명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니다. 그런 경우 그 사건은 기적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범인의 차원에까지 끌어내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이 놀랍다. 심지어 신부님들까지 강론에서 이런 식으로 화제를 끌고 가기도 한다. 가톨릭 작가로 유명한 일본의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도 이런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표본적인 보기가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 대한 설명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니, 사람들이 싸가지고 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먹어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왔다….’

참으로 귀신도 곡할 정도로 교묘한 설명이다. 설명이 그럴듯한 정도에 등급을 매긴다면, 단연 금메달 감이다. 하나 이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꾀에 대한 찬탄이요 잃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다. 하느님께 기적을 청하시는 기도를 바치신 다음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위엄과 자비와 권능에 찬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부각되는 것은 웅변가 급의 인물로 위축된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믿을 수 있으면 믿는다고, 믿을 수 없으면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거기에 대해 잔꾀 섞인 풀이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분명히 답하라고 우리에게 물어오는 물음 둘이 있다. 그 하나는 성령으로 인한 성모님의 ‘거룩한 잉태’ 사건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에 대해서만은 각자 분명한 답을 마음속에 준비해놓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기적을 조건 없이 믿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린이같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설명하기 힘든 현상은 세상에 많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 왔던 마술사 유리 겔라(Uri Gella)도 그런 이상한 힘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유리 겔라를 따라서 ‘벤드(bend)! 벤드!’ 했더니 나의 손 안에 있던 스테인리스 젓가락이 녹아서 4, 5도 정도 휜 것을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직하고 있었다.

사전(事前)에 유리 겔라가 나한테까지 와서 트릭(속임수)을 쓰라고 지시한 바도 없다. 나는 유리 겔라가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초능력’ 또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가까운 일본의 ‘마리끄’ 씨도 같은 능력의 소유자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기적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인가. 인성(人性)도 지니시고 신성(神性)도 지니신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일에 그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되는 라자로에게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명하셨다. 그런데 라자로의 소생이 믿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생명을 스치면 기적은 인다. 여기에 기적의 비밀이 있다. 그런데 생명을 스치는 일은 사랑에서 온다. 그러니 결국 기적도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덩어리이시다. 예수님의 ‘트릭’을 쓰지 않은 순수한 기적을 믿기가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성찬경(시인·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