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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경의 반투명 인생노트 (35) 현실과 허구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
입력일 2012-01-04 수정일 2012-01-04 발행일 2012-01-08 제 277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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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상상의 영역에서 상상 외의 ‘큰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허구(虛構)는 ‘fiction’을 가리키는 말인데, ‘fiction’을 ‘픽션’으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도저히 내가 관대해질 수 없다. ‘f’와 ‘p’의 음가(音價)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른데, ‘fiction’을 ‘픽션’이라고 표기하고 무심할 수 있다면 외국인이 우리를 ‘발음치(發音痴)’라 헐뜯어도 항변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허구는 서로의 영역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이 있다고 보통 생각할는지 모르겠는데,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상의 장소와 시간상의 위상, 곧 시간상의 ‘장소’, 이 두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내용이 바로 ‘현실’이라고 보통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설명도 꼭 맞는 표현이라 할 수가 없다. 표현상으로 헐렁헐렁한 틈서리를 없애자면, ‘몇 날 며칠 어디어디에서 일어난 사건을 머릿속에서 다루는 (처리하는) 우리의 의식내용’ - 이것이 육화(肉化)된 (삶 안에 소화된) 우리의 ‘현실’이다.

얼마 전에 나는 누가 ‘인생이 무엇이오?’ 하고 물으면 ‘인생이란 지금 여기요’ 하고 대답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허술한 약식(略式) 표현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인생이란 지금 여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우리의식의 내용이오’ 이렇게 말해야 될 판이다.

전에 내가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문과대학 내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두 교수가 어떤 중요 안건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은 지금 다 잊어 버렸다) 서로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고 절대 양보를 하지 않을 기세였다. 야단났다. 정면충돌하는 이 두 안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안고 중국 관광 여행을 떠났다. 중국을 돌아다니는 보름 정도의 기간 내내 나는 어찌나 심뇌했던지, 소화도 안 되고 거의 위에 무슨 병이 날 지경이었다. 사건은 한국에서 발생했는데, 고민은 중국에서 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두 사람이 웃으며 나타났다. 그리고 ‘학장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안을 마련했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 심뇌를 했나!

우리의 생활 안에서의 ‘현실’은 우리의 외부, 어느 시간과 어느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다루는 우리의 의식 내용이라는 점을 실감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의식 안에서는 사건 자체만이 의식이 다루는 요소(要素)가 아니며, 가정(假定)에서 출발하는 염원(念願)이나 희구(希求) 등 여러 가지 상황도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다. 인식의 대상은 외부에 존재하지만, 인식은 주관적인 마음작용의 결과다.

이러한 허구적 요소를 꾸미고 이끌어가는 것이 다름 아닌 상상의 구실이다. 여기서 허구와 상상력을 거의 동의어로 보아도 상관없다.

허구 곧 상상의 상념들이 현실적 요인에 대해서 큰 힘을 발휘하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의식 안에서는 현실과 상상의,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이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의식 안에서의 허구적 요소와 허구적 요소의 비율은, 사람 따라, 개성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돈밖에 몰라 남에게 늘 인색하게 구는 사람의 머릿속 의식은 현실을 가리키는 지수(指數)가 압도적으로 많고, 늘 꿈을 좇다가 현실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로맨티스트’는 꿈과 상상과 허구의 수치가 무척 높을 것이고, 현실적 요소의 수치는, 예컨대 치밀한 타산, 계획 따위의 수치는 빈약할 것이다. 어느 경우이건 다 개성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 비율일까? 현실 8 상상 2 정도라 하면 될까? 아니, 현실 7 상상 3 정도 되는게 아닐까?

요새 화제가 되고 있는 위대한 현실가 스티브 잡스의 경우는 어떨는지 몰라. 현실 7 상상 3 쯤 될까? 아니 역으로 현실 3 상상 7 쯤 되는게 아닐까? 물론 이러한 수치도 허구적 요소에 속하며, 정밀한 계량의 결과는 아니다.

상상의 영역에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힘을 발휘 하는 것이 기도다.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