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성찬경의 반투명 인생노트 (34) 시간의 큰 정거장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
입력일 2011-12-27 수정일 2011-12-27 발행일 2012-01-01 제 2777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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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가 사는 한, 주님을 찬양하리라
시간에도 정거장이 있다.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다는 동지도 시간의 웬만한 정거장 쯤은 된다. 동지도 이미 지났다. 올 동지에는 오래간만에 팥죽을 먹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이 끓여주시는 팥죽이 생각난다. 그때는 팥죽에 설탕을 많이 쳐서 아주 달게 해서 먹었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 단 팥죽이 왜 그렇게 맛이 있었던지 지금은 그 맛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신화시대의 맛, 아니 천상의 맛, 이렇게 말하면 될까?

팥죽에는 새알심이 들어간다. 새알심! 참 예쁜 말이다. 말만 예쁜 게 아니라 실지로 탁구 공보다도 작은 메추리알 만한 찹쌀 떡 공은 참 예쁘다. 어렸을 때 먹던 팥죽에는 꼭 새알심이 있었지. 새알심 없는 그런 팥죽은 없었다.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신화시대다.

영혼의 새알심. 전에 나는 어느 시엔가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영혼의 새알심? 이 말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뜻이 뭘까? 이 시구의 작자인 나도 잘 모른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우선 써놓고 보았다. 무슨 뜻인지를 적확히는 몰라도, 무엇인가 멋진 ‘아우라(aura)’가 서리면 우선 그런 말을 써놓고 보는 것이 ‘시쟁이’ 또는 ‘시치(詩痴)’의 버릇이다. 시인의 이러한 무책임한 기질 때문에 독자 여러분이 당혹스러울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영혼의 새알심, 뭔지 여운이 있는 말이긴 하다. 우리 모두는 이런 말의 정체를 찾아 순례길을 가는 나그네들이다.

동지에 이어 곧 성탄절이 왔다. 성탄절, 크리스마스 날은 굉장히 큰 시간의 정거장이다. 대전역이나 대구역쯤 되지 않을까?

하느님이 육화하사 사람이 되셔서 인간계로 내려오신 날, <천지창조> 다음으로 하늘과 땅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날, 크리스마스. 요새는 기운도 기동력도 달려서 성탄 자정미사에는 못가고 집에서 조용히 성탄의 뜻을 마음속에 아로새긴다.

새해 달력의 시작. 1월 1일이라는 시간의 정거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수도 서울의 서울역이다. 돌고 도는 시간의 원점 정월 초하루.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시간을 창조해 주시고, 각자에게 수명(壽命), 곧 시간이란 일정한 장소를 마련해 주시고,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 마음대로 노력하며 살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1월 1일이, 2012년 임진년이 장엄하게 밝아온다.

올해는 1월 1일이 일요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성탄절도 일요일이었다. 축일과 일요일이 겹치는 일이 그리 흔하지는 않다. 언제였더라? 그래 1967년 1월 1일이 일요일이었지. 그날 하느님께서 내게 큰 아들을 주신 날이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미래는 언제나 순결한 처녀지다. 순백의 스크린이다. 사람의 능력으로 미래를 미리 볼 수는 없다. 이 청결한 캔버스에 무슨 그림을 그릴까.

고전 중의 고전, 단테의 『신곡』 읽을 때 주석(註釋)에서 본 것인데, 사람은 미래는 못 보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마귀는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지만 미래는 미리 볼 수 있다 한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답게 참으로 지당하신 처사다.

과거는 모두 잊어버렸으므로 즐거움(추억)이란 없고, 미래는 먼저 알아버리니까 일할 의욕도 없고 희망도 없을 수밖에 없으니, 마귀의 차지다. 반면에 추억이 있으니까 즐겁고 미래를 모르니까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 이것은 사람의 몫이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한두 가지 좋은 결심도 하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하느님, 올해는 제게 놀이와 노동이 하나 되는 시간을 많이 주세요. 하느님 사랑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구 한 편을 「시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내가 사는 한.

나의 하느님께 찬미 노래하리라. 내가 있는 한.

(146, 1∼2)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