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3) 권일신 (1)

입력일 2010-02-09 수정일 2010-02-09 발행일 2010-02-14 제 268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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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 등과 합심해 선교활동에 헌신
북경 주교에게 보낼 편지를 준비하고 있는 권일신(탁희성 작품).
권일신 성현은 1742년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시암 권암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형 철신과 함께 당대에 명망이 높은 대학자로서 정조 임금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아꼈다고 알려져 있다.

1784년 이벽 성조의 설교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할 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라는 교명을 택한 성현께서는 이벽 성조, 이승훈 성현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다. 그 열심과 학식은 이벽 성조의 기대이상이었다.

성현께서는 자신만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족 전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주위의 친구와 친지들에게도 신앙을 전하였다. 이 세 사람, 즉 이벽 요한 세자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은, 새로이 개척한 진리의 길로 합심하여 나가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 백성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권일신은 충남의 이존창도 입교시켰다. 그 때부터 내포는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왔다. 전라도에 천주교회를 전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는 일도 역시 권일신에 의해서였다. 유항검을 입교시킴으로써 호남 천주교회는 시작되었다.

1785년 을사년에 형조판서 김화진이, 명례방 김범우 선생의 집에서 이벽 성조의 주도로 개최되던 천주교 집회를 주목하다가 수색한 후에, 김범우를 체포하고 성물을 압수하여 갔는데, 이것이 한국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박해인 을사박해였다.

성현께서는 이때 집회에 참석했던 여러 양반 자제들과 동교인으로서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형조에 들어가서, 김범우를 석방하고 성물을 돌려주기를 강력하게 청하였지만 주인인 김범우만 귀양가고, 그 외의 양반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을사박해 이후, 명례방 집회는 중단되었고, 신자들의 공동체는 해산되다시피 하였다. 더욱이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 이벽 성조께서 문중과 가정의 박해로 순교하시자, 활발하게 전교하던 권일신은 이 최초의 천주교 신도단체와 신도집회를 다시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조동섬과 함께 용문산에 들어가서 침묵과 잠심으로 8일간 자발적인 피정을 하였다. 그 후, 대학자였던 권일신 성현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등은 다시 힘을 합쳐 교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에 복음전파를 더 쉽게 하고, 신입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성현께서는 이승훈 성현과, 정약용 형제들 및 다른 유력한 신자들과 함께 임시 준 성직제도를 정하여 성무를 수행하면서 신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승훈 성현께서 북경에서 주교, 신부 등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 성무집행하는 것을 보고 왔으므로 이를 모방하여 신자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신도대표들은 천주교 예절서나 교리서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읽고 교회의 임시 책임자들을 선정하였다. 지위와 학식과 덕망으로 또 이승훈 성현보다 나이가 14세나 더 연장자인 가장 뛰어난 권일신 성현께서 중심이 되어 일하게 되었고,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 여러 사람이 사제로 선임되었다. 주교 성성식이나 사제 서품식 비슷한 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전국 각처를 나누어 담당구역 책임을 맡았으며, 각기 자기 임지로 직행하여 설교하고, 성세와 고백 성사를 주고, 미사 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는 등 사목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