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2) 이승훈 (3)

입력일 2010-02-02 수정일 2010-02-02 발행일 2010-02-07 제 268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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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할 때까지 신앙전파에 전력 다해
을사박해로 서울의 양반들이 모두 통문을 돌리며 들고일어나자, 문중의 유림들과 원로들이 연쇄반응으로 일제히 분격하여 일어났으며, 서울 양반들의 영향은 문중으로 가정으로 점점 강도를 더해서 심한 박해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 성현의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모든 천주교 책들을 빼앗아 안마당에 쌓아 놓고, 문중대표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질러 태우게 하니, 이른 바 분서(焚書)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이승훈 성현께서는 굴하지 않고 신유박해 때 목이 칼에 떨어질 때까지 신앙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 성현은 그 처남들과 더불어 글을 닦던 반촌에 집회처를 정하고, 자신과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정약용 등을 함께 신부라 일컬으면서, 주일미사 등의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임시 준성직자단을 만들어 얼마동안 지내는 사이에, 그 임시 준성직자단 중의 어떤 이가 이러한 직무가 교회법에 잘못되고 어긋나는 것을 알고난 후, 1789년 10월 북경에 윤유일을 보내어서, 그 제도가 잘못된 것임과 조상의 제사를 지냄도 옳지 못하다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이승훈 성현은 임금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1789년 33세 때에는 경기도 평택현감이 되었으나, 그는 그 벼슬자리에 나아가서도 천주교 신앙 때문에 공자 위패를 모신 향교의 문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림의 지탄을 받아, 2년 후 그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조선교회를 이끌어 가던 이승훈,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로부터 임시 준성직자단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자, 곧 윤유일을 그곳에 거듭 보내어, 정식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북경 주교 구베아는 1794년 12월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주 신부가 이듬해 정월에 서울로 들어와 보니, 조선천주교회는 이벽 성조의 창립 이후, 임시 준성직자단의 활동으로 이미 4000여 명의 영세신자를 가진 큰 교회로 성장되어 있었다. 주 신부는 강완숙이라는 여회장의 집에 숨어서 4000명의 교우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우리 정부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인길, 윤유일, 지황 사바만을 잡아 죽이고 이승훈 성현을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주 신부는 다행히 살아서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까지 두루 다니면서 전교에 힘쓴 결과, 1801년까지에는 많은 수의 교우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정조가 갑자기 그해 6월에 죽고, 그의 계조모이던 벽파의 김대비 정순왕비가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의 정권을 잡게 되니, 그녀는 그해 12월부터 교인들을 잡기 시작하여, 이듬해(1801)에는 300여 명의 교우들을 죽이는 신유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승훈 성현은 체포되자마자 박해자들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로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며 굽히지 않으므로 억지로라도 천주교를 버린다는 소문을 내야만 하는 박해자들은 그의 취조문에 이승훈 성현의 대답이 아닌 자기들의 생각을 추가하여 허위조작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안의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는 대학자 이승훈 성현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소문을 꼭 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교 선언자들은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서 귀양을 보내었으나, 박해자들이 조작한 허위배교자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허위조작의 탄로가 새로운 불씨가 되므로, 천주교를 안 하기로 하고 배교한다고 말했다고 허위조작한 후 즉시 처형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 천주와 교회를 위해서 신앙 때문에 칼에 목이 떨어진 사실을 모든 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처형되기 직전 최후의 형벌을 참관한 박해자 대표단이 직접 보고한 바를 읽어보자.

즉 성현이 순교하시기 겨우 12일 전인, 그러니까 2월 14일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는 이승훈 등 3인의 추국 광경을 목도하고 상소하기를,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오니 승훈 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로 서려 있고, 마수(魔手)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건만 형장(刑杖)을 참으려 굴복지 않고, 사찰이 당장 잡혔건만 죽자 하고 실토치 않으니 천하에 이같이 모질고 흉측한 종류가 어디 또 있으리까?” 하였다. 또 며칠 전 「헌부신계」 (憲府新啓)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어허, 통탄할 노릇이로다! 가환, 승훈, 약용의 죄여! 칼과 톱 보기를 낙지로 삼고, 이미 대각의 성토가 극률을 청하는데 이르렀건만, 모질게도 움직이지 않고 끝끝내 고치지 않는도다! 지금 이 3인을 치죄하지 않고는 비록 날마다 백 명씩을 베어도 종당 금할 길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이 3인을 먼저 엄히 추국하여 그 정상을 얻어 쾌히 나라의 형법을 바로잡아야 하겠나이다” 라고 했다.

서소문에서 칼을 받기 직전 동생이 따라가서, 피투성이가 된 이승훈 성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다니, 아버님과 조카들과 형수님과 저희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말씀만 하시어 우선 목숨을 보전하고 보십시다” 하자, 이승훈 성현은 “무슨 소리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고, 물은 치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하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하시어, 당신의 신앙은 변함없이 하느님께 있고, 세도가들의 칼날은 스스로 소멸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장엄하게 순교의 칼을 받으셨다.

1801년 음력 2월 26일, 양력 그해 4월 8일이었고, 당시 나이는 45세였다. 박해자들이 서둘러 이승훈 성현의 목을 칼로 자른 이유는, 북경에 가서 최초로 영세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박해자들이 몹시 미워하였고(in odium fidei), 이승훈 성현의 목을 잘라야 다른 선비들이 천주교를 믿지 않을 것이니 교육상 필요했고, 박해자들 자신이 허위로 조작한 배교문장이나 배교 소문이 탄로가 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 받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