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 이벽 (9·끝)

입력일 2010-01-12 수정일 2010-01-12 발행일 2010-01-17 제 268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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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 반대에 식음 전폐하고 기도에 전념
이벽 성조가 활동했던 천진암 강학당 터 기념표석.
김범우의 동생 현우, 적우, 관우, 성우를 비롯해 최인길, 최창현, 김종교, 이존창, 권상문 등 당시 열렬한 제자들이, 염병에 함께 걸려도 괜찮으니, 이벽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공은 강경하게 거절하며 야단을 쳤다.

사실상 약 3개월간에 걸친 문중회의와, 시내 양반들의 모임과 관청에서의 전갈 등으로 인해 격할대로 격하여져서, 목을 매달기까지 했던 처지에서, 무슨 말인들 못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일부 낭설 중에는 이벽 성조께서 급살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났다는 등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이때 이벽 성조께서는,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고, 신도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또 문중들을 만나서 천학도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집을 나가고 싶었으나, 부모님들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쳐 나갈 수가 없었다.

만일 천학을 하러 또 나가려거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매달아죽는 꼴을 먼저 보고서 나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다되어,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목욕하고 깨끗한 의복을 갈아입은 다음 의관을 바르게 한 후, 당신 방에 들어가서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바꾸지 아니하며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묵상만으로 전념하셨다.

당시 한국예의상, 부모가 격노한 경우, 자녀들은 며칠씩 식사를 안하거나 못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고요히 기도에 열중하면서, 천주를 생각하고 명상하다가 15일이 지나자 그만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시니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 12시였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천주교가 최초로 겪는 박해 중에, 최초의 제물은 거룩히 천주께 바쳐졌으니, 당시 나이 만 31세였다. 학문적 지식인 천학을 종교적 신앙인 천주교로 승화시키고 한국 천주교회를 세우신 이벽 성조에 관하여는 1801년 황사영이 그의 백서에서, 1818년 다산 정약용이 그의 묘지명과 각종 경서주해서, 그리고 1840년 김대건 신학생이 그의 한국 천주교 회사 개요에서, 그리고 1847년 정학술이 이벽전에서, 끝으로 1872년 샤를르 달레가 그의 한국 천주교회 역사서에서, 항상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자로 밝히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벽 성조의 무덤은, 그 후 학계와 교계에 전해지지 않았고, 문중에서도 밝히지 않아서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으나, 1979년에 실로 기적적으로 사후 195년 만에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공동묘지 한복판에서 파묘 직전에 변기영 신부에 의하여 찾아져서 지석과 함께 확인되어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옛 강학회터에 이장됐다.

끝으로 정약용 요한의 이벽 성조 만사를 듣자.

신선나라 학이 인간들 사이에 내려오시니,

헌연히도 신선의 풍채를 보이셨네.

깃과 날개는 희기가 눈 같으니,

닭들과 집오리들이 시새워 골내며 샘내네.

울음소리는 우렁차서 아홉하늘 진동시키고,

내는 소리 밝고 맑아 풍진에 뛰어났네.

가을이 되어 돌아갈 때를 맞아 홀연히 날아가버리니,

하염없이 슬퍼하며 애달파한들 무슨 소용있으랴.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