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수단을 입으며] 정진성 신부 - 성인 신부는 아무나 되나

명학본당 주임
입력일 2009-07-14 수정일 2009-07-14 발행일 2009-07-19 제 265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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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성 신부
얼마 전 교황님께서 아르스의 비안네 성인 천상 탄일 150주년을 맞이하여 사제의 해를 선포하셨다. 본당신부의 수호성인이신 성 비안네 신부님을 본받아 본당신부들의 성화와 선종하신 신부님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사제직의 고귀함을 상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사제의 해가 선포 된 후 혼자 옛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제 서품 후 받은 축하의 인사말 가운데 가장 많았던 인사말 “꼭 성인 신부님 되세요~”

이 인사말을 기억하며 이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신자들은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제의 해가 선포되고 몇 주 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을 지내며 김대건 신부님이 모진 타향 생활을 견디시고 그렇게 고국 땅을 밟길 원하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초의 방인 사제를 기다리며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열정적인 믿음과 끊이지 않는 애덕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던 신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과연 이러한 초기 신자들의 믿음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대건 신부님이 과연 계셨을까?

얼마 전 미사 끝난 뒤 성당 문 앞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뵙는 듯한 어느 자매님이 다가와 다짜고짜 어떤 신부님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이다. 우리 성당 신부님은 미사 전에 고해성사도 주지 않고, 미사가 끝나면 인사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고, 성당에 오면 신부님 얼굴 뵙는 것이 하느님 얼굴 뵙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 자매님께 여쭈어보았다.

“자매님은 고해성사 1년에 몇 번이나 보십니까?” 하고 물으니

“1년에 두 번 정도 판공성사 때 고해합니다.”

“ ...... ”

그 자매님이 ‘본당 신부님이 왜 평일에 고해성사를 드리지 않으실까?’ 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본다면 그렇게 험담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막상 고해성사를 드리기 위해 고해실에 30분 전에 들어가 있으면 한 명이나 두 명 정도가 고해성사를 드린다. 30분 동안 고해성사 드리는 시간보다 기도하거나 책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주일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주말과 주일미사 5대, 미사 참석 인원수가 800명 정도인데 비해 고해성사 드리는 신자 수는 20명 남짓하다. 사제는 분명 고해실 안에서 단 한 마리의 양을 되찾는 심정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양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인간적으로 나약해질 수도 있고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다. ‘어차피 두 명 세 명 성사 드리는데 10분 전에 들어가도 되겠지’ 라는 나약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더 나가서는 평일 미사 전에 고해소의 불이 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신자들은 사제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제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거룩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신자들에 의해서다. 사제는 직무수행과 성사집행으로 거룩해진다. 사제의 직무수행과 성사집행은 사제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자들과 함께,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사제들 가운데 ‘나쁜 사제’는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드는 신자들은 있다. 영적이고 거룩한 사제를 육적이고 세속적인 사제로 만드는 신자들, 그저 인간적인 친분관계만을 원하는 신자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보지 않고 인간적 잣대로 보는 신자들이 사제를 사제 자신도 모르게 변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 순교 성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성사에 목말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영성체 한 번, 고해성사 한 번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모습을 지금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사제의 해를 맞이하여 사제는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신자들도 거룩해 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제는 혼자서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