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1) 손골성지 성 도리 헨리코 신부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9-05-06 수정일 2009-05-06 발행일 2009-05-10 제 2647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본국 송환 거절하고 새남터서 순교
성 도리 헨리코 신부.
한국교회 103위 성인 시성 25주년을 맞아 ‘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을 연재합니다. 우리 교구에는 한국 교회의 자랑이자 신자들의 모범인 103위 성인들의 숨결을 간직한 성지가 여럿 있습니다. 성인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성인을 모시고 있는 성지를 함께 소개하며 25년 전 한국 교회 첫 성인 탄생의 기쁨을 되새겨 봅니다.

‘나는 늘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중략) 사랑하는 부모님. 나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하게 되면 하늘나라에서 만날 것입니다.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865년 10월 18일. 26살 벽안의 신부가 프랑스의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말을 배우기가 어려워 내년 부활대축일 전에는 고해성사를 줄 수 없을 것 같다던 그는 불과 5개월 후 부활을 맞이하지 못하고 순교한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 한국 성은 김(金)이다.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생 틸레르 드 탈몽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염전과 농사일을 하는 부부는 가난했으나 신심이 깊었다. 그는 소신학교에서 8년간 수학한 후 1860년 뤼송의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862년 8월 23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위험한 선교사로서의 활동에 대해 그의 건강 상태를 알고 있던 부모는 이를 극구 말렸다. 그러나 그는 “어머님!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 동안이나 이 소명에 대하여 생각해 왔습니다. 하느님이 제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라고 말해 승낙을 받고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6월 15일 조선의 선교 신부로 결정되었다. 볼리외(Beaulieu) 신부 등 동료 3명과 1864년 7월 15일 홍콩, 요동 등을 거쳐 1865년 5월 27일 충청도 내포 지방에 도착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경기도 용인 손골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그곳 신자들과 함께 지냈다. 마침 1866년 2월 병인년 대박해의 소식과 베르뇌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지 며칠 후 그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문초에서 관리들이 본국에 송환하겠다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베르뇌 주교와 여러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사형 집행일인 3월 7일 의금부 옥에서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도리 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 주었다.’

목격했던 한 신자의 증언이다. 도리 신부는 이날 신부들 중 맨 마지막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 손골성지

도리 헨리코 신부는 그의 편지에서 손골은 아주 평화로우며 모든 주민들이 매일 자신의 방을 찾아 미사에 참례한다고 전하고 있다. 또 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행복하고 만족한다고 덧붙인다. 손골성지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다.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포졸들에게 잡힌 곳일 뿐 아니라 1857년 페롱신부, 1861년 조안노 칼레 신부, 1863년 오 오매트르 신부 등이 입국해 활동하던 곳이다. 조선 제4대 교구장인 장 베르뇌 주교도 방문(1861년, 1863년)했던 곳으로 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성지다. 성지에는 현재 성인의 유해 일부를 모신 묘와 동상이 들어서 있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