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천재를 기억하며

최용택
입력일 2024-06-20 수정일 2024-06-26 발행일 2024-06-30 제 339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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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개혁군주 정조는 1790년 9월 12일 특별히 과거 시험장에 나와 합격자들을 친견하고 70세 이상의 고령 합격자와 20세 이하 소년 합격자를 따로 불러 한차례 시험을 더 치렀다. 16세 최연소 합격자였던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은 임금이 직접 점수를 매긴 시험에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그 뒤로 황사영은 임금이 잡았던 손목에 평생 띠를 두르고 다녔다. 견직물인 명주로 만든 토시로, 이 토시로 인하여 이백 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고령토 속에서 덩어리진 검은 천 조각이 나왔고 비로소 그의 묘가 확인되었다니 기적이었다. 황사영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송추계곡 가마 산 35번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천재는 정조의 총애로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에 대한 열정과 패기로 배론성지 토굴에서 조선교회에 대한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썼다. 이 백서로 그는 대역부도죄를 선고받고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황사영이 썼던 ‘백서’는 조선왕조를 부정한다거나 국가를 전복하려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조선의 정치적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데 있었기에 역적으로서의 모습만 부각된 역사가 바로잡히고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황사영 백서에 대한 후대의 격렬한 반응은 전체 백서가 아닌 가백서 만을 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서 원문에는 황사영이 청나라에 조선을 편입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없었다. 사람들은 편집된 가백서만 보고서 황사영의 이름에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오직 신앙의 자유, 하나뿐이었다. 백서 원본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정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전국 188곳의 성지순례 중 한 곳으로 의무적으로 순례해야 하는 성지 완주의 차원이었지만, 황사영 묘소를 순례하며 참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지금이라도 가족들을 합장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약용(1762~1836)의 큰형인 정약현의 장녀이자 정약용에게는 조카였던 부인 정명련과 아들 황경헌,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던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생가에서 모여 잠들게 하여주길 기도했다, 물론 하늘나라에서는 가족이 모여 있지 않겠는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밀알이 된 교회사에 불편한 역사적 진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박해가 끝난 시점에서 제일 먼저 순교자들의 자손들을 살펴 주었다면, 황사영의 아들 황경헌이 추자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또 부인 정명련의 삶이 어떠했는지, 기록이라도 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현재 천주교인은 6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양적 성장을 거듭했지만, 질적으로는 반성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천재 황사영의 진심을 이해하고 백서를 통해 천재가 고백한 신앙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신앙은 곧 세상을 구하는 좋은 약이라고 생각되어 신앙을 지켰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 진심을 새삼 되돌아보면서, 세상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은 그 고백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글 _ 노정남 아가다(서울 한강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