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ㆍ공소ㆍ예비신학교를 거처 1926년 9월에 장연본당에서 선발되어 용산신학교에 입학했다. 신입생의 수는 66명이었는데 나이로는 11세부터 18세까지였고, 학력으로는 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아이들로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있었다.
「신학교」라고는 하지만 인가(認可)도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강습소도 아니요, 글방도 아니다. 그러니 자연학제도 말이 아니었다. 주요학과는 소학교 1학년 학과 정도뿐이었다. 따라서 라띤어 상ㆍ하급반을 위하여 교사신부가 두 분이요 일반학과를 위해서는 한분의 교사뿐이었다. 그러니 하루일과가 간단할 수밖에.
아침기도ㆍ미사참례ㆍ성체조배ㆍ저녁기도 등 영신생활을 빼고는 라띤어 공부가 전부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신통치 않다. 규율은 너무도 엄격ㆍ폐쇄적이어서 같은 운동장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대화가 금지되어 있다. 어린 마음속에도 장차 신부가 되어 세속에 나가 어떻게 신부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몇몇이 주동하여 학교 측에『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진정(陳情)을 올렸다.
그런데 올리는 태도가 불손했던지 즉석에서 17명이 퇴학당했다. 요구사항은 타당했으나 방식이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후 여름휴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보니 학제가 전면 개편되었다. 소신학교가 용산에서 혜화동으로 옮겨졌고, 우리 학급은 동성상업학교 을조 2학년으로 편입, 처음으로 당당한 정식 중학생으로 어깨에 힘을 주게 된 것이다. 낮에는 중학교 과목을, 저녁에는 라띤어를 배우며 5년제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용산 대신학교에 입학, 철학과를 시작하는데 프랑스에서 처음 나온 철학박사가 강의를 하는데 반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울며 겨자먹기로 멍하니 앉아 있는 때가 많았다. 그럭저럭 철학과를 끝마치고 신학과에 들어섰는데 역시 그 타령이었다. 생각다 못해 다시 진정을 올리기로 하고 우선 교수양성을 위해 인재양성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필두로 모든 제도를 개선해 달라는 24개 조항을 결정해 놓았으나 범위가 넓고 요구사항이 너무 많아 제출 방법이 큰 문제였다. 제1차 진정사건을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극렬론자들은 강경론을 내세우지만 진작 앞장서야 할 사람은 총급장인 나인지라 방법만은 내게 맡겨 달라 했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좋은 기회만을 기다릴 뿐….
때는 왔다. 교장 신부실에 가서 이발을 하는데 벌써 눈치를 채셨는지 먼저 물으신다. 『그 뭐 학생들이 원하는 것 있다며』하신다.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원하는 것이 많습니다』『말해봐』그래서『목욕시설, 도서실설치, 운동장확장, 밤10시까지 자유 연구시간』등을 열거하다가『더 많은데 서면으로 올리겠습니다』했더니, 쾌히 승락을 하시므로 24개 조항을 적어 올렸다. 이제는 떨리는 맘으로 반응만 기다렸다.
매일 저녁식사 전에 5분 명상 시간이 있는데 그때의 주제가 마침 하느님의 신비였다. 교장신부님은『하느님의 신비가 다 알아듣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가 24가지가 있다』고 해 놓고, 신비스럽게 설명을 하시는데 다른 학생들은 영문도 모르고 나만 겨우 짐작할 뿐이었다.
다음날 교수회의가 진행된 후 교장신부님이 원 주교님을 찾아가 상담하고 돌아오셨다. 무슨 벼락이 떨어지려나 하고 초조히 기다렸는데 태도로 보아 큰일은 날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나에게 호출이 내렸다. 천만뜻밖에 안온한 표정으로『큰일 날 뻔 했어! 신학생들이 그런 생각까지 할 수 가있나? 우리가 다 생각하고 있던 것이니까 들어주지만 너희들이 청해서 해주는 줄로는 생각지 말아!』하시고『다음 달 차부제품 준비해야지』하신다. 후련했다. 모두 각자 불려가서 똑 같은 말을 듣고 나왔으니 희생자는 없음이 분명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한 가지 두 가지 시정되기 시작, 3개월이 지나면서 23개 조항이 시정, 완료됐다. 다음해에 인재양성을 위해 윤을수의 프랑스 유학을 선두로, 한공렬ㆍ선종완ㆍ정규만ㆍ이완성ㆍ최석우ㆍ최익철 김정진 학생 등은 일본으로 보내고, 이어서 로마 등 유럽각국으로 유학을 보내 그들이 박사학위를 얻어 돌아오는 때가 지금의 서울가톨릭대학이 대학으로 승격되던 무렵이어서 시기적절하게 교수진을 구성하고 보니 하느님의 안배는 참으로 오묘하다는 것을 실감치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진정(陳情)의 혜택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1년이 지난 1939년 6월 24일 6명의 동창과 함께 서품되어 포교전선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