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삶은 한 송이 꽃과 같다.
세상 어떤 꽃보다 아름다워야 할 꽃,
내게 주어진 시간으로 내 푼수껏 가꾸어 가야할 시간 꽃이다.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난다.
「피서」라는 말 그대로 여름을 피하려고 동서남북 길이 뚫린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잠시 일터를 잊고 쉬면서 지낼 수 있는 이 금쪽같은 시간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옆도 뒤도 보지 않고 달아난다. 그저 달아나기 위해 달아나는 양, 주마간산도 아까와 아예 차속에 눈을 가두고 맥없이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든다.
달리는 차 꽁무니에서 연기가 나온다. 연기는 들로 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뭉게뭉게 구름덩이가 되어 비를 몰고 온다.
쾌락의 비, 교만의 비 자기상실의 비…그 비는 상대적으로 함께 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소외감의 비, 냉담의 비, 나아가 미움의 비로까지 변질된다,
모두들 비를 맞으며 왜 맞는지 모른다, 그 비가 어떤 비인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진정 알찬 휴가는 여름을 피하는데 있지 않고 여름을 당당하게 맞이하는데 있지 않을까 싶다.
올 여름, 내보따리 속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쓸까? 며칠을 두고 궁리하다가 한 곳을 정했다. 온천이었다.
뜨거운 여름에 온천이라니… 얼핏 엉뚱해 보이지만 내 안의 작은 악마 신경통이 이열치열의 비법을 배우라고 나를 그리로 잡아끌었다.
다행히 온천둘레엔 숲이 우거진 산도 있었다. 여름산 안에서는 한창 싱그러운 녹색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슴 가득 안겨 오는 잡목 숲의 향기가 있고 머루ㆍ다래ㆍ산사ㆍ보리똥ㆍ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산속엔 배울 것이 많았다. 궁그는 돌에게서도, 나무에게서도, 작은 풀잎 속에서도 배움의 싹이 돋았다. 홀로 숲에 들어오니 금세 사람이 그리워졌다.
『만일 여럿이 떼지어 왔다면 이토록 그립진 않을 꺼야』나무 가지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참 그러고 보니 이즈음 나는 도무지 누굴 그리워할 줄 모르며 살았구나. 띄엄띄엄 떨어져 발로 이웃을 만들 때처럼 이웃을 그리워할 줄 모르고 살았구나.
어쩌다 벗이 생각날 때면 긴긴 사연 엮어 보내는 대신 전화 한 통화로 그리움을 떼우고 말았구나.
빠른 세상, 편리한 세상을 살면서 그리움도 점점 얄팍해지는 걸까? 빛이 바래는 걸까? 그러나 아니다. 이것이 나의 삶이 아니다.
나는 힘껏 도리질을 했다. 내게 있어 삶은 한 송이 꽃과 같다. 세상 어떤 꽃보다 아름다워야 할 꽃, 내게 주어진 시간으로 내 푼수껏 가꾸어 가야할 시간 꽃이다,
그러니까 날마다 내가 숨 쉬는 시간은 날마다 내가 가꾸는 삶의 꽃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 또한 자기의 시간 꽃을 가꾸고 있다.
시간 꽃은 꽃 이름 그대로 시간 속에서 피는 꽃이지, 눈에 띄는 어떤 자리에 피었다 지는 꽃이 아니다.
그러기에 꽃을 피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끈기가 필요하다. 한 송이 시간 꽃을 피우기 위해 나는 생명이 다하도록 내 시간을 보살펴야한다.
아름답고 선연한 시간 꽃을 피우도록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느껴야 하리라.
이 여름 산과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이에겐 섭섭해 하지만 말고 자신 안에서 자라는 시간 꽃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작은 어항 속 금붕어의 춤을 눈여겨보고 뜰에 핀 장미의 황홀한 성장을 한껏 축하해주는 동안 더위는 슬며시 물러서고 시간 꽃은 몰래몰래 봉오리를 맺으리라.
뿐만 아니라 바램이 이루어져 산과 바다를 찾는 경우라도 가슴속 시간 꽃만은 잊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폭포소리, 그 거쿨진 산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더위 뿐 아니라 답답한 마음도 시원하게 뚫어보자. 그러면 우리도 폭포수처럼 헌걸찬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으리라.
바람, 그 가벼운 춤사위를 보며 날마다 불어나는 욕망의 무게를 덜어보자ㆍ그러면 위도 바람처럼 홀가분한 자신을 가꿀 수 있으리라.
은은한 달밤ㆍ멀어진 하늘이 별과 함께 가까이오고 있다. 나는 별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별 하나 하나에 내가 아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와 속삭였다. 『얘기의 끝이 없어도 괜찮아요. 서로마주보고 얘기를 나누는 당신의 바로 그 모습이 보기 좋아요.』
달님이 곁에서 내게 속삭여 주었다.
『달님,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내 안에서 피어날 시간 꽃을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되고 햇빛이 되고 물이 되고 싶어요. 시간 꽃-그것은 곧 저의 생명이니까요』
달님의 은빛 옷자락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