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선율] 14. 재회 ③

글 한림·그림 나건이
입력일 2020-05-18 13:57:39 수정일 2020-05-18 13:57:39 발행일 1974-04-14 제 91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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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J방송국에서는「젊은이들의 광장」이라는 프로에 우리 삼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초청해 주었다.

생방송이라는 선입감이 나처럼 씩씩하지 못한 애송이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었다.

그러나 대대장 옆에 자리한 나는 심심찮게 마이크를 들게 되었었다.

사회를 보는 여자 아나운서는 우습게도 대대장과 많이 이야기하려 했다. 그럴적마다 그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대신「유진우 생도가 그 점에 대해서 더 강하게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 보텀(Pottom=저학년)이니까요」라고.

그러면 나는 그 말을 받아서 그럴싸하게 떠들어댔었다.

대답하고 나면 귀가 멍멍하고 어리둥절했지만 한편 썩 잘 대답한 것 같이 느껴져서 어깨가 으쓱거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지금까지 벼르던 말을 꺼내었다.

『형, 제가 차니를 만나는 걸 허락하시겠어요?』

『내 허락이 필요하지 않겠지. 그러나 입시 준비로 좀 바쁠 거야. 제량껏 해 보지 그래』

『질투하지 않으시는 거죠?』

『에이, 이 사람』

『형, 저는 형을 질투해요』

『괜찮아』

『어떻게 할까요?』

『집으로 가 봐』

『형은?』

『난 친구 집에 좀 들리겠어. 물으면 그렇게 말해 줘』

『감사합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차니를 대하지 않으면 안 돼』

『물론이죠』

사실 나는 떨렸다.

만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할까? 웃을까? 아니 좀 심각한 표정을 지을까?

어떻든 닥치는 대로 해 보자는 심산으로 심호흡을 하고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제주도는 초인종을 단 집이 별로 없다.

그만큼 자유스럽고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나 그날만은 사정이 좀 달랐다.

어떻게 차니를 불러야 할지 몹시 난처했다.

정원에서 한참 우물거리고 있는데 누가 밖으로 나왔다.

순간 나는 대문을 밀고 들어올 때의 걱정이 해결된다는 기쁨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향나무와 짙은 정원수들이 무성하게 정원을 덮고 있었다.

겨울이라 모두 짚을 둘러 쓴 귤나무들도 듬성듬성 있었으나 어떻든 어두운 정원은 그윽했다.

상대는 누가 자기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무성한 향나무 그늘로 자취를 순식간에 감추었다.

나는 다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 버렸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밖으로 나와 주는 사람은 없었다.

헌데 나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조그맣게 시를 읊조리듯 귓가에 와 닿은 그것은 높낮이가 심하면서도 우아한 멜로디였으며 세상을 다 포옹할 수 있는 아늑한 음향이었다.

그것은 차니임에 거의 틀림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사랑이여 우리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살아 왔네.

……내가 울었지.

나는 그 노랫소리를 찾아서 조금씩 걸어갔다.

약간 고개를 숙여야 될 만큼 키가 작은 관목 가까이 이르렀을 때 드디어 노랫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달콤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살며시 이어지는 그것은 진짜 기도에 흡사한 자세 그것이었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 그대에게 내리시라. 그대는 나의 생명.

나의 온갖 즐거움.

그대는 나의 생명, 나의 온갖 즐거움.

나는 박수를 쳤다.

아픔다운 노래를 듣고 조금 마비된 내 귀에까지 크게 들릴 만큼 크게. 그러나 세 번만.

『삼촌?』

차니는 물었다.

그 짧은 질문은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는 억양이 있었다.

꼭 삼촌이라는?. 나는 불현듯 대대장에게 기분이 나쁠 정도로 가슴을 치밀고 분노를 터트렸다.

그럴 것까진 없었으나 나는 질투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눈이 번쩍 뜨였다.

차니는 후라쉬로 내 눈을 쏘고 있었다.

그러나 적에게 총을 들이대는 잔인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미약한 것이었다.

조그만 참새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부리를 치켜들 듯.

참새는 도무지 포수를 쪼아 줄 만큼 왁살스럽지 않은 따뜻한 새이다.

어찌다 산란총에 맞아 떨어진 참새를 손 안에 쥐었을 때 그저 조용히 할딱거리다가 조그만 심장을 거둬 버리는 걸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참새가 쓰러져 버렸을 때 가엾어서 운 적이 있었다.

차니의 후라쉬는 그처럼 너무 작아서 애처로운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불빛이 눈을 못뜰 정도도 못 되었기에.

그런데도 그녀는 후라쉬를 끄고 나직히 말했다.

『어떻게?』

『차니를 만나러』

『조금 전에 방송 들었어요』

『떨리더군요』

『그러나 조리 있게 생도생활을 말씀하시던데요』

『정말 해사는 멋있는 곳입니다』

『명령이 살아 있다는 표현이 좋았어요. 그러나 거기엔 반듯이 있어야 할 게 빠진 느낌이었어요』

글 한림·그림 나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