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대림절 논단] (끝) 가난하게 오신 구세주 예수/이한택 신부

이한택 신부·예수회 신학원장
입력일 2020-03-19 14:07:24 수정일 2020-03-19 14:07:24 발행일 1977-12-18 제 1085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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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에 누인 아기의 메시지는 가난
가난한 이의 대열 속에서 주 맞이해야
구유의 탄생은 우리 가난에 동참한 것
우리는 지난 호 이 난에서 마리아가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구세주를 모실 수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동정 마리아의 아들로서 우리 가운데 오신 사실에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구세주 예수께서는 야훼의 가난한 이를 당신의 어머니로 삼아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물질주의와 배금사상의 만연으로 인한 비인간화 현상이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오늘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이 사실의 참 뜻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우리도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의 대열 속에서 가난하고 겸손하신 구세주를 맞이하여야겠다.

우리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구세주는 정녕 우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마리아를 어머니로 택하신 그분은 목공 요셉에게 당신과 어머니를 맡겼고 가장 가난한 목동들에게 당신의 탄생을 제일 먼저 알려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주셨다. 왕 중의 왕이시고 평화의 왕이신 구세주의 표징은 고작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보고 기뻐할 수 있게 그 가난한 이들에게 가난하게 오시는 구세주, 이는 권좌에 앉은 헤로데와 하느님 사정과 법률에 능통하다고 자처하는 지도자들에게는 오히려 불안한 존재가 되셨다.

그러기에 이 가난하신 주님을 진정 모시려 할진대 우리들도 가난한 목동들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지금 여기서 나타나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식별하여야 한다.

가지지 못한 목동들이 본 구세주의 표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명상해 보자.「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루까 2, 12)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가난이다. 갓난아이는 무엇보다도 말을 못한다. 자기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이기도 하다. 지나간 시대나 지금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은 고사하고 마땅히 할 권리가 있는 말마저 할 수가 없다. 그들은 흔히 가진 사람들의 횡포와 수탈의 희생물이 되면서도 그들의 억울함을 침묵으로밖에 호소하는 수가 없다.

갓난아기 구세주는 바로 이 침묵에 동참하시는 것이다. 목동들이 이 아기에 대하여 듣고 본 바를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루까 2, 17) 우리도 가지지 못한 이들을 통하여 오시는 구세주의 대변자 되어 그분의 메시지를 널리 전파하여야겠다.

갓난아이 구세주는 강보에 싸여 있었다. 즉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움직임에도 제약을 받는다.

가난한 이들의 또 하나의 현실이 제한된 행동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황금만능시대이어서 돈만 있으면 못하는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가진 자들은 행동의 자유를 (적어도 외적으로) 마음껏 누리는 좋은 시절이다. 그런가 하면 가지지 못한 자들은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비합법적으로 행동과 심지어는 생각까지도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주위에는 비참한 노동 조건 속에서 법정 노동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허덕이고 있는데도 이러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에는 생계와 때로는 생명에까지도 위협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제한을 받고 있는 근로자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최근에 발생한 장성탄광의 참사는 그야말로 이러한 문제들의 빙산일각이 아닌가? 강보에 싸인 구세주 예수는 모든 행동을 성모께 의탁하셨다. 우리도 성모처럼 강보에 싸인 구세주의 팔이 되고 손이 되어 우리 가슴 속에 오시는 그분의 움직임을 대신하여야겠다.

강보에 싸인 갓난 아이 구세주가 한 안방의 아랫목도 아니며 화려한 궁궐의 내실은 더욱 아니었다. 거기는 허름한 외양간의 구유통이었다.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께서 우리 가난함에 얼마나 동참하고 싶어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사실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에라도 들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여관방 하나 구할 수 없엇기 때문이었다. (루까 2·7) 집없고 방없는 설움을 살고 있는 이들은 역시 가난한 사람들뿐이다. 다시 우리 주위에는 방 한 칸이 없어 온갖 불안 속에 떨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화려하게 더 크게 더 많이 갖고 싶어 가난한 이웃에게 더욱더욱 인색해지는 부자들도 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대도시 외곽에「장관」을 이루고 있는 철거민들의 판자촌 또는 천막촌에도 강보에 싸인 구세주가 누여져야겠다. 우리들의 가슴은 이 구세주를 포근하게 감싸주신 가난하신 성모님의 품이 되고.

「베들레헴」의 한 외양간에 태어나신 구세주는 크리스마스 때만이 아니라 한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으셨다. 나자렛에서 삼십 년 동안 땀 흘리며 노동자 생활을 하셨고 공생활 삼 년 동안에도 가지지 못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하시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봉사하시지 않았는가?!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가장 약하고 가장 버림받는 가난한 자의 죽음에 동참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로 부요하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것은 그렇게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들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꼬린또 후 8·9)

이한택 신부·예수회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