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적 중요성 부각돼 한국교회 발전의 초석 이룬 인물들 묻혀 시유지 매입 위한 범교회적 운동 펼쳐야
최근 서울 용산 성직자묘지의 일부가 시유지임이 알려지자 토지매입뿐 아니라 묘지에 안장돼 있는 고인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 모아지고 있다. 조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비롯, 주교 4위ㆍ성직자 65위ㆍ신학생 2위ㆍ무명 순교자 1위 등 72위의 묘가 있는 용산 성직자묘지는 시유지 매입을 위한 범 교회적 움직임이 서서히 확산되면서 교회사적 중요성도 함께 부각되고 있다.
1890년 서울대교구가 현 위치에 부지를 매입한 이후 84년 경기도 용인에 새로운 성직자묘지를 마련하기까지 지난 94년간 성직자들의 안식처로 터전을 잡아온 용산성직자묘지는 한국교회 발전의 초석을 이룬 고인들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곳으로 개개인의 묘는 하나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소 주교(1792~1835)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선교 1백주년인 1931년 만주 열하성「뻬리쿠」에서 시신이 옮겨짐으로써 94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선의 품에 안기게 됐다.
블랑 백규삼 주교(1844~1890)는 제 7대 조선교구장으로 한불자전편찬ㆍ방인성직자양성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고아원ㆍ양로원 설립등 사회사업의 토대를 쌓았다.
백 주교에 이어 8대교구장에 오른 뮈뗄 민덕호(1854~1933) 주교는 순교자현양과 한국천주교회사정립에 공헌을 남기면서 순교복자시복에 많은 열성을 쏟았다.
용산성직자묘지에 안장돼 있는 또 한사람의 주교, 드브레 유세준 주교(1877~1926)는 서울 보좌주교로 있으면서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자료수집에 헌신하면서 원주교구 용소막성당 등 지방성당 설립에 매진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교회발전에 큰 공헌을 남긴 한국인 성직자로는 대표적으로 윤을수ㆍ최민순ㆍ유수철ㆍ윤형중ㆍ이문근ㆍ양기섭ㆍ박성종 신부 등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 목자로서 유감없는 생을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을수 신부(1907~71)는 문학박사로 성신대학 2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인보성체수녀회ㆍ고아원 및 결핵요양원 등을 설립했다.
최민순 신부(1912~75)는 문인으로 돈키호테를 번역, 번역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구약ㆍ시편 완역, 주의 기도ㆍ대영광송 기도문 작성 등성서 및 전례보급에 큰 업적을 남겼다.
유수철 신부(1918~77)는 꾸르실료 국내 도입당시 초대 지도신부를 역임하면서 꾸르실료 정착에 힘썼으며 이문근 신부(1917~80)는 최초의 합창성가집인「가톨릭성가집」을 출간한 음악인으로 전례음악 토착화에 금자탑을 쌓았다.
가톨릭 대표적 지성인으로 알려졌던 윤형중 신부(1903~79)는 언론창달과 저술활동을 통해 교리전파에 힘썼으며 성모병원 안은행에 처음으로 안구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밖에 배론 성역화를 주도했던 양기섭 신부(1905~82)ㆍ초대 JOC지도신부를 지내면서 한국 JOC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던 박성종 신부(1925~83)등 아직도 신자들의 가슴에 생생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목자들이 용산의 한 언덕에서 숨 쉬고 있다.
이같이 목자들의 따뜻한 입김이 서려있는 성직자묘지가 최근 시유지로 판명남에 따라 용산본당은 목자들의 안식처를 되찾기 위한 범 교회적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으나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성직자묘지를 되찾는 것은 곧 교회역사를 되찾고 목자들의 숨결을 찾는 것이므로 신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당연한 의무의 하나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