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용산 성직자 묘지,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등 72위 안장

입력일 2020-02-14 12:00:09 수정일 2025-05-07 16:55:15 발행일 1986-08-31 제 152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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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적 중요성 부각돼 

한국교회 발전의 초석 이룬 인물들 묻혀 
시유지 매입 위한 범교회적 운동 펼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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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비롯, 주교 4위, 성직자 65위, 신학생 2위, 무명순교자 1위 등 72위의 묘가 있는 용산성직자 묘지.

최근 서울 용산 성직자묘지의 일부가 시유지임이 알려지자 토지매입뿐 아니라 묘지에 안장돼 있는 고인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 모아지고 있다. 조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비롯, 주교 4위ㆍ성직자 65위ㆍ신학생 2위ㆍ무명 순교자 1위 등 72위의 묘가 있는 용산 성직자묘지는 시유지 매입을 위한 범 교회적 움직임이 서서히 확산되면서 교회사적 중요성도 함께 부각되고 있다.

1890년 서울대교구가 현 위치에 부지를 매입한 이후 84년 경기도 용인에 새로운 성직자묘지를 마련하기까지 지난 94년간 성직자들의 안식처로 터전을 잡아온 용산성직자묘지는 한국교회 발전의 초석을 이룬 고인들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곳으로 개개인의 묘는 하나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소 주교(1792~1835)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선교 1백주년인 1931년 만주 열하성「뻬리쿠」에서 시신이 옮겨짐으로써 94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선의 품에 안기게 됐다.

블랑 백규삼 주교(1844~1890)는 제 7대 조선교구장으로 한불자전편찬ㆍ방인성직자양성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고아원ㆍ양로원 설립등 사회사업의 토대를 쌓았다.

백 주교에 이어 8대교구장에 오른 뮈뗄 민덕호(1854~1933) 주교는 순교자현양과 한국천주교회사정립에 공헌을 남기면서 순교복자시복에 많은 열성을 쏟았다.

용산성직자묘지에 안장돼 있는 또 한사람의 주교, 드브레 유세준 주교(1877~1926)는 서울 보좌주교로 있으면서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자료수집에 헌신하면서 원주교구 용소막성당 등 지방성당 설립에 매진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교회발전에 큰 공헌을 남긴 한국인 성직자로는 대표적으로 윤을수ㆍ최민순ㆍ유수철ㆍ윤형중ㆍ이문근ㆍ양기섭ㆍ박성종 신부 등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 목자로서 유감없는 생을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을수 신부(1907~71)는 문학박사로 성신대학 2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인보성체수녀회ㆍ고아원 및 결핵요양원 등을 설립했다.

최민순 신부(1912~75)는 문인으로 돈키호테를 번역, 번역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구약ㆍ시편 완역, 주의 기도ㆍ대영광송 기도문 작성 등성서 및 전례보급에 큰 업적을 남겼다.

유수철 신부(1918~77)는 꾸르실료 국내 도입당시 초대 지도신부를 역임하면서 꾸르실료 정착에 힘썼으며 이문근 신부(1917~80)는 최초의 합창성가집인「가톨릭성가집」을 출간한 음악인으로 전례음악 토착화에 금자탑을 쌓았다.

가톨릭 대표적 지성인으로 알려졌던 윤형중 신부(1903~79)는 언론창달과 저술활동을 통해 교리전파에 힘썼으며 성모병원 안은행에 처음으로 안구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밖에 배론 성역화를 주도했던 양기섭 신부(1905~82)ㆍ초대 JOC지도신부를 지내면서 한국 JOC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던 박성종 신부(1925~83)등 아직도 신자들의 가슴에 생생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목자들이 용산의 한 언덕에서 숨 쉬고 있다.

이같이 목자들의 따뜻한 입김이 서려있는 성직자묘지가 최근 시유지로 판명남에 따라 용산본당은 목자들의 안식처를 되찾기 위한 범 교회적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으나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성직자묘지를 되찾는 것은 곧 교회역사를 되찾고 목자들의 숨결을 찾는 것이므로 신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당연한 의무의 하나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