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청 신앙교리성 장관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3월 25일 성모영보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6번째 회칙「구세주의 어머니」발표에 즈음, 기자 회견을 갖고 성모회칙과 성모성년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성모 마리아는 이 시대 희망의 표징
왜 또다시 성모님에 관한 회칙을 내놓는가? 왜 또다시 성모성년을 선포하는가? 틀림없이 최근 몇 주간 동안 이런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질문은 교회와 「거리가 먼」사람들뿐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에게서도 나왔다. 성모회칙과 성모성년이 양측에 다 관련되기 때문이다. 교황님의 새로운 회칙을 주의깊게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두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 사실 이 회칙의 의도는 이미 선포된 성모성년의 규모와 방향을 밝히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님이 또 한번의 일반 성년을 치르려는 것도 단순히 새로운 교회행사를 벌이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역사의 현시점이 제기하는 구체적 도전들을 더 잘 식별하고 거기에 가장 적절한 대답들을 찾기 위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간의 내적 연관성을 추구하는 강렬한 역사의식이 회칙에 나타난다. 교황님은 시대의 징표들을 신앙의 빛으로 해석, 교회와 인류의 여정에 지침을 제공하고자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이번 성모성년의 주제이다.
회칙의 구조는 이것과 일치된다.「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의 성모」를 다룬 제1부는 성서에 나오는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회칙의 전반적인 스타일의 특징은 성서와의 밀접성과 메시지 속에 사랑이 잠겨있는 것이다. 성서해석의 특별한 한 요소는 공의회 프로그램과 조화된다는 것이다. 바로 첫 눈에 양극으로 갈라지는 것같이 보이는 구절들을 자주 짝지음으로써 새롭고 예기치 못한 전망이 전개되는 것이다. 제2부는 역사적 노선을 따라 교회의 순례자로서의 여정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위치를 다루고 있다. 특별히 여기에 교회 일치적 차원이 나타난다. 제3부는 성모님의 어머니다운 중재를 이야기하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과거의 모든 요소들을 전개시킨다.
기자회견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회칙의 풍부한 메시지를 전부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나는 회칙의 교의적 방향과 특수한 스타일을 드러내는 몇 가지 중요 포인트만 언급할 수 있다. 역사철학의 차원에서 회칙의 주요 노선들은 표면적으로는 별로 공통점이 없는 두 성서 구절, 묵시록 12장과 창세기 3장을 연결시키는데서 즉시 명백해진다. 신약의 마지막 책인 묵시록은「여인의 표징」을 인상깊게 말하고 있다. 그 여인은 결정적인 역사의 한순간에 일어나 그때부터 줄곧 하늘과 땅을 화해시킨다.
역사의 기원들
교황님은 이 예언이 바로 역사의 기원에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한다. 원죄에 뒤따르는 단죄 속에는 교부들이 「첫 복음」이라 부르는 저 신비스러운 구절이 있다. 바로 죄의 순간이 복음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그 구절은 사탄에게 한 말을 담고 있다.『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세기3, 15)이 성서본문들은 둘 다 세 인물이 나오는 드라마를 말하고 있다. 한쪽에는 「여인」과 「아기」 다른 쪽에는 용(뱀)이 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간의 드라마, 구원과 멸망간의 드라마, 다른 말로하면 역사의 드라마이다.
교황님은 다른 두개의 성서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여인의 표징」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끌어낸다.『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루까1, 28)라는 천사의 인사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읍니다…』라는 에페소서(1, 3)에 언급된 은총, 축복과 선택을 명확히 한 다음에 완전히 설명된다. 만일 「여인의 표징」에 대한 하느님의 첫 말씀에 나오는 저주가, 표징의 의미를 불확실하게 남아있는 채 역사 안에 축복과 저주가 동등하게 균형을 이룬다는 인상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 의미는 마리아가 그 장면에 등장함으로써 결정된다. 즉 축복은 저주보다 더 강한 것이다.「여인의 표징」은 희망의 표징이다. 그 여인이 희망의 오솔길을 가리켜준다. 이와 같이 드러난,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결정은 『악과 죄에 대한 어떠한 체험보다도, 인간의 역사 속에 점철된 모든 「원수관계」보다도 더 강력하다』(회칙 11항). 이에 비추어 교황님은 역사의 현시점내에서 「여인의 표징」을 본질적인 「시대의 표징」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성모성년의 의의다. 이 표징이 가리키는 길에서 우리는 길을 가리켜주는 그 여인을 통해 역사를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희망의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교황님이 이 회칙에서 매우 광범하게 발전시킨 성모님의 중개에 관한 교의다. 틀림없이 이점에 대해 신학적, 교회 일치적 토론이 집중될 것이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도 이미 「중개자」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교회헌장62) 성모님의 중개의 한계(사동60과 62)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교도권의 문헌에서 이 주제가 이처럼 광범하게 다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 내용에 있어서 회칙은 공의회가 이미 언급한 것을 넘어가지 않고 공의회의 용어를 답습하고 있다. 하지만 회칙은 공의회의 언급을 더 깊이 검토하고 신학과 신심을 위한 새로운 비중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교황님이 중개라는 개념을 모든 오해로부터 방어하면서 신학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개념들을 간략하게 밝히고자한다. 그러고 나야 비로소 적극적인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교황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중개의 유일성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일성은 배타적이 아니라 내포적이다. 즉 그것은 여러 형태의 참여를 가능케 해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들 간의 상호성과 협조를 말소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로서로를 위해 하느님과의 중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우기 이것은 우리 일상적인 체험의 단순한 사실이다. 각 인간은 다른 이들의 현존 덕분에 자신의 신앙을 사는 까닭이다. 인간 스스로의 개입으로 하느님께 이끌어주는 다리를 건너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스스로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존재와 그 분의 친밀성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인간은 서로를 위해 중개자들이 될 수 있고 사실 중개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중개에 종속된 인간 중개의 가능성과 한계가 전체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의돼 있다. 이것에서 출발하여 교황님은 그 자신의 용어를 개발한다. 성모님의 중개는 「참여적 중개」이며「종속적 역할」이다(38항). 공의회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에 근거를 두고 거기 속하며 거기서 전적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22항, 교회헌장 60). 성모님의 중개는「전구」의 성격을 띤다(21항).
특별중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중개에 협조하는 모든 다른 인간에게와 마찬가지로 성모님께 해당이 된다. 이 점에서 성모님의 중개는 다른 사람들의 중개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교황님은 이 중개의 고유한 양식이「예외성」을 띠며 특수하고 반복될 수 없는 방법으로 그것은 성인의 통공으로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가능한 그 중개까지도 능가한다는 것을 이 점에 첨가하고 있다.
교황님은 그 중개의 의미가 특별히 성모님의 개입으로, 말하자면 아직 오지 않은 「그 분의 때」를 앞당기는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허락 받은 「가나 기적」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나타난다는 관점을 개진하고 있다. (21항). 성모님의 전구에 대한 특수한 성격을 자세히 다룬 것은 특히 3장에 나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공통점이 없으나 바로 그들의 상호관계에서 놀랍게도 새로운 빛을 발하는 성서구절들을 아주 묘하게 연결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교황님의 기본 테마는 다음과 같다. 성모님의 중개의 특성은 세상에 항상 새로운 그리스도를 낳도록 정해진, 모성적 전구라는 사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계속해서 교회활동의 항구한 기원이 됨으로써 교회의 현재 활동에서 여성적 차원을 지켜준다. 이러한 맥락으로 회칙은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읍니다』(갈라디아4, 19)라는 바오로의 말씀을 인용한다. 교황님은 너무나 자주 잊혀진 『초기교회가 가졌던 자신의 모성에 대한 의식』(43항)이 여기에 표현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교회의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이 차원이 성모님 안에 드러나고 항구하게 정박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꼭 반대로 말하는 것같이 보이는 한 성서구절에 그 생각의 바탕을 두고 있다. 어떤 낯선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신이 나서 그런 사람을 낳은 여인을 찬양하며 외치자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까11, 28)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교황님은 비슷한 성격을 띤 주님의 다른 말씀『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루까 8, 21)를 이 말씀에 연결시킨다.
겉으로 보기에 반(反)마리아적인 이 표현들은 이끌어준다. 첫째, 되풀이될 수 없는 단한번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탄생을 초월해서 계속될 수 있고 계속 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모성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결과는, 그리스도를 항상 새롭게 탄생시키는 이 모성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지키는 것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이 두 본문은 바로 루까복음에서 취한 것이다.
루까는 마리아를,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자기 안에 품고 간직하고 성숙하게 하는 여자의 이상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루까가 주님의 이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실상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경의 참된 동기에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함축한다. 루까는 마리아의 모성이 단순히 단한번의 되풀이 될 수 없는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전인격으로 어머니였으며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성신의 활동으로 교회가 탄생되는 순간에 구체화된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공동체가운데 계신다. 그 공동체는 성신강림으로 교회가 된다. 성신의 능력을 통해 나자렛 예수가 강생하는 것과 성신강림절에 교회가 탄생하는 것과의 유비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이 두 사건을 연결시키는 고리는 성모 마리아이다(23항). 성신강림 사건에서 교황님은 우리시대의 모습, 성모성년의 한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희망의 징표를 보고자하는 것이다(33항).
교황님은 루까가 섬세한 암시로 드러내는 것이 요한복음에 완전히 발전돼있는 것으로, 십자가위에서 당신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완전히 발전돼있는 것으로 본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와『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씀은 언제나 주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의 마리아의 특별한 역할을 생각하도록 이끌어왔다. 이 말씀은 참으로 마리아적 사고의 중심점이다. 교황님은 이 말씀을 십자가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유언으로 해석한다. 여기 빠스카신비 한가운데서 마리아가 어머니로서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다. 십자가 발치에서 무르익은 새로운 사랑의 열매인 마리아의 새로운 모성이 거기에 나타난다(23항).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차원이 명백해진다. 이것은 「요한에게 뿐 아니라…모든 제자에게, 모든 크리스찬에게…」해당된다「인간의 유산이 되는 마리아의 모성은 선물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각 개인에게 인격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45항).
그리고 나서 교황님은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19, 27)고 복음서가 그 장면을 마무리하는 말을 매우 교묘하게 해석한다.「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것들 가운데 맞아들였다」고 해야 한다. 교황님에게는 이것이 그 제자-모든 제가-와 마리아와의 완전한 인격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의 내적인 영적ㆍ종교적 삶을 이루는 모든 것에 마리아를 모셔감을 뜻한다. 그것은 자신이 마리아의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실존의 내밀함으로 이끌려가도록 허락하는 것을 뜻한다. 서로에게 서로를 맡기는 상호위탁에 이끌려 가도록 허락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낳고 인간을 그리스도와 닮게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역할은 교회안의 여성의 모습에, 여성적 차원과 여성의 특수한 역할을 비추기도하고 특별히 비춰준다.(45항)
이점에서 회칙이 통일되게 엮고있는 모든 성서 본문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사실 복음기자 요한은 가나이야기와 십자가 처형이야기에서 두번 다 성모님을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고 어머니라 말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요한은「여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창세기 3장과 묵시록 12장 즉 「여인의 표징」과의 연결이 지어지고 틀림없이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일반적이고 모범적인 가치를 지닌「여인」으로서 마리아를 가리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 처형 기사는 그 자체로 역사철학의 차원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부정(否定)의 세력과의 투쟁에서 어머니다운 역할로 참여하는 「여인의 표징」에 대한 참고가 되고 그래서 희망의 표징이다. (24항과 47항)
이 본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회칙에서 바오로 6세의 「하느님 백성의 신경」한구절로 요약돼 있다.「우리는 천주의 성모를 둘째 에와로 또 교회의 어머니로 믿으며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대하여 어머니의 임무를 수행하고 계시며 구원된 사람들 마음 속에 천상생명을 낳아주시고 더해주시는 데에 힘쓰고 계심을 믿나이다」(47항).
이 모든 것이 곧 성모성년의 내용을 결정짓는다. 삐오 12세의 성모성년은 원죄없는 잉태와 성모승천이 라는 두개의 마리아교의에 따른 것인 반면 이번의 의도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에 있어서의 성모님의 특별 현존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48항). 새로운 성모성년은 회상하는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데에도(49항) 목적이 있다. 그것은 미래를 지향하는 힘찬 추진력을 갖고 있다.
교황님은 성 블라디미르의 세례 1천주년 기념을 상기한다. 그것은 러시아 키에프공국의 그리스도교 전래 1천년 기념으로 볼 수도 있는데 교황님은 이것을 그리스도탄생 2천주 기념과 연결짓고 있다. 이 기념은 우리에게서 단순히 기념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이들 연대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 우리의 참다운 역사적 인간적 정체에 눈을 돌리도록 우리를 촉구한다. 역사의 기초를 향한 그러한 쇄신된 우리 역사의 향방이 이 성년의 가장 깊은 의미다. 우리들이 특히 서로 서로 재빨리 뒤따르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과 모든 영적 가치들의 위기를 지닌 우리의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실종의 진원지를 인식할 절박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교황님이 성모성년에 부여한 배경은 아주 명백하게 그 내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것은 성신강림절에 시작된다. 성신강림절의 모습은 우리 정체의 모습-회칙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진정한 희망의 모습이 돼야한다. 교회는 교회가 되는 의미를 마리아에게서 다시 배워야한다. 교회는 「여인의 표징」에 다시 돌아설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된 교회의 여성적 모습에로 다시 돌아설 때 비로소 성령의 창조적 능력에 새롭게 열리게 되고 따라서 홀로 역사의 중심점과 희망을 마련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와 닮게 된다. 성모성년은 성모승천 축일로 마감된다.
그래서 우리를 마리아 안에 이미 구원받은 인류, 큰 희망의 표징에로 다시 관련시킨다. 이 마리아 안에서 구원의 위치, 모든 구원의 위치가 너무나 명백해진다.
회칙의 결론에서 교황님은 다시 우리 시대의 영적 상황과 성모성년의 의미를 극적으로 구체화시킨다. 교황님은 현재의 역사적 시점의 대립적 성격을 내다보며 옛 대립찬미경 「사랑하올 구세주의 어머니」를 해석하고 특히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나려고 애쓰는 당신 백성을 도우소거』라는 말을 강조한다. 성모성년은 확실히 「넘어짐」과 「일어남」간의 결정적인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성모성년은 각 사람의 양심이 「넘어지지 않는」길을 따르도록, 이 길이 어느 길인지 성모님에게서 배우도록 각 사람의 양심에 도전하려는 것이다. 성모성년은 『도우소서, 꼭 도우소서, 넘어진 당신 백성을』이라는 단한마디의 외침이 돼야한다. 회칙이 설명하듯이 성모성년은 단순한 감상적 신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이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세대에 요청되는 임무를 깨닫도록, 그리고 이처럼 많은 위험 가운데 「넘어지지 않는」길을 따라가도록 우리 세대에 보내는 충정어린 호소다.